[수필] 만사천원 만큼의 비를 맞다 ( 공동제 수필 우산 )
서 대 화
비오는 날 우산은 소중한 필수품이다. 그러나 비가 내리다가 중도에 개었을 때는 거추장스러운 짐으로 변한다. 남성들의 소지품 중 가장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은 우산이라는데 이견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중간에 비가 그친 날이면 웬만한 남자들의 기억력은 우산에서 이미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
이만큼 살아오며 사용한 우산은 몇 가지가 된다. 5. 60년대에는 기름먹인 종이우산을 많이 사용했다. 새로 산 紙우산을 처음 펼쳤을 때 우산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경쾌한 음악처럼 탄력성이 느껴져 듣고 즐기는 멋이 있었다. 감성적 삶에 비중을 두며 살던 젊은 시절 나는 비오는 날의 정경이 좋고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듣기 좋아 하릴없이 빗길을 걷기도 했다.
70년대 들어 비닐제품이 널리 보급되면서는 하늘색 비닐우산이 주종을 이루었다. 대나무를 이용해 만들어진 비닐우산은 물자가 넉넉지 않던 그 시절에도 가격에 부담이 없었다. 그러나 바람이라도 요란하게 불 때에 잘못 펼치면 새것이라도 뒤집어 지거나 찢어지는 곤욕도 겪어야 했다. 그런데 중도에 비가 개이면 아무 곳에나 던져 버려도 아깝지 않다는 장점이 있기도 했다.
그 때는 검은색 헝겊 우산은 흔치가 않았다. 질긴 천으로 만들어진 우산은 소지하고 있는 사람의 인품까지도 고상하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요즈음은 어린아이들도 천으로 만든 검은 색 우산을 쓰고 다닌다. 촘촘한 우산살로 받쳐 만든 방수천의 우산은 보기에도 튼튼해 보이고 많은 비가 내려도 물방울이 쉽게 새어들지 않는다. 그런데 중도에 비가 그쳤다 하면 이것 역시 놓고 나오기 일쑤라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런데 우산은 오로지 비를 피하거나 가리는 용도로서 보다 그 상징성에 더욱 깊은 의미를 두는 경우가 많다. 대중가요의 노랫말에 보면 『나는 당신 우산이 되고』 라고 하는 나훈아의 사랑노래가 있고 우순실의 『잃어버린 우산』 이라는 퍽 감성적인 노랫말도 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겪게 되는 아픔을 막아주는 우산 같은 존재가 되거나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고 감싸며 사랑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화제를 좀 더 비약시키자면 핵우산이라는 전쟁용어도 있지만 그 무시무시한 공포감은 상상하는 것조차 싫어 여기서는 생략한다. 어떻든 우산이라면 용도나 의미로서도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인 것은 분명하다.
요즘은 노란우산 무슨 회라는 제도가 있어 중소상인들의 경제적 보호막이 되어준다는 광고도 볼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우산이란 비오는 날 물리적으로 필요한 물건이기도 하지만 재난 혹은 재해로부터 보호받는 사회적 안심제도로 표현되기도 한다.
한때 제조업을 운영하던 친구의 이야기다. 수 십 명의 직원들과 착실한 경영으로 생산하고 국내외로 많은 주문과 오더를 받아 열심을 다 하던 때 지역 은행에서 기업의 우산이 되어 주겠노라며 좋은 조건으로 융자를 제의해 왔다. 마침 시설 증축을 구상하던 때라 공장 건축 부지를 구입하고 공사가 시작될 무렵 때마침 불어 닥친 IMF의 파고로 인해 운영은 차질을 빗게 되었고 투자했던 증축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소식이 알려지자 제일 먼저 찾아온 방문객은 융자를 제의해 왔던 은행 측 담당자였다. 도움이 되고 우산이 되어 준다던 그는 빠른 시일 내에 융자금을 환수 하겠다며 기일을 임박하게 설정하고 돌아갔다. 정작 바람 불고 궂은비가 심하게 내리는 날 찾아와서는 빌려간 우산을 얼른 내놓으라며 엄포를 놓은 것이다. 은행의 입장으로 볼 때는 그럴 수 있을 것이라며 이해할 수 있어도 얄팍한 세상인심은 어디서든 찬바람이 매서울 뿐이다.
며칠 전 흐린 날 새벽 시간에 외출할 일이 생겼다. 일기예보를 확인했더니 강수 확률은 50프로라고 한다. 이 수치(數値)는 계산할 것도 없이 비가 오거나 안 오거나 둘 중에 하나라는 의미다. 우산을 가지고 나가라는 아내의 말을 무시한 채 빈손으로 외출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탔다. 이른 새벽 창밖을 내다보니 조금씩 내리는 빗방울로 더러는 우산을 받쳐 든 행인도 있고 그냥 걷는 이 들도 있다. 버스의 운전대 앞창을 보니 윈도 브러쉬가 진양조 판소리처럼 여유 있게 빗물을 훔쳐대고 있다. 새벽길을 달려 내려야 할 정류소에 도달했다. 그런데 내가 내리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하늘에서는 요란하게 빗줄기를 퍼붓기 시작한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지고 비를 피할만한 곳은 만만치 않다. 지나가는 택시라도 있다면 좋겠는데 이른 새벽 아직은 출근시간 전이라 앞을 지나는 빈차가 없다. 다행이 인근 건물의 처마 밑 작은 공간이 있어 그곳으로 몸을 피하고 빗줄기가 뜸해지기를 기다렸다. 내리는 비의 세력이 잠시 주춤하는 틈을 이용해서 건물 뒤 편의점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우산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대에 섰다.
“만사천원입니다.” 가격을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다시 물어도 분명히 만사천원이다. 잠깐 생 각 했다. 집까지 걷는다면 5분이면 족하다. 집에는 기념품으로 받은 큰 우산이며 가끔씩 사용하는 중간 우산 그리고 접는 우산과 살이 꺾인 헌 우산 까지 족히 열 개가 넘을 많은 우산이 있다. 아무리 비오는 새벽녘 우산 파는 곳이 이곳뿐이라 해도 구입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5분쯤 걷기로 하고 그냥 편의점을 나섰다. 간편한 여름옷 한 벌 세탁하면 그만이라 마음먹고 비를 맞으며 걸었다. 꼭 만사천원 만큼의 비를 맞은 셈이다.
그런데 알 수 없고 오묘한 것이 인간사인가. 빗속을 쉰 걸음도 채 걷지 않았는데 세차게 내리던 빗줄기가 가늘어지더니 이내 멈추는 것이 아닌가. 가벼운 걸음으로 집에 도착했는데 얇은 여름옷 상의가 촉촉하게 젖었을 뿐이다. 소중한 현금을 아꼈다는 사실도 그러하지만 순간적 결정이 적중했다는 것이 마음을 즐겁게 했다. 만약 접는 우산 하나를 구입해서 빗속을 걷기 시작해 오십여 미터쯤 갔을 때에 비가 그쳤다면 그 비싼 우산 값에 대한 박탈감도 그렇지만 한치 앞도 예측하지 못하는 내 진득하지 못한 무력함에 얼마나 낙망하며 후회 했을까.
지나친 비약이나 인간의 정신이 해결의 열쇠를 발견하지 못한 우연이나 요행 혹은 신비란 이런 것이 아닐까. (끝)
2001년 수필문학 천료등단
한국 수필문학가 협회 회원
저서 : 수필집 휘파람새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