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가제의 마무리 이자 白眉인 할렐루야 찬양이 끝났다. 나는 헨델의 이 곡을 편하게 감상하기 위해서 무대로 오르지 않고 객석 맨 뒷자리에 서서 그 거룩한 합창을 몸으로 전부 받아 들였다. 리허설 때 완벽하지 않은 음정으로 따라 불렀던 그 음악이 객석에서 들으니 유명 합창단의 실황처럼 장엄한 찬양으로 변했다. 성가대 모든 대원들의 음악적 재능과 역량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감동에 젖어 있는 동안 많은 관객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 한다. 일곱 팀 중에서 광림 남성성가단이 가장 감동스러웠을 것이다. 나는 자만에 가까운 마음으로 단원들과 함께 성전 로비를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어떤 젊은이 하나가 나를 보고 반색을 한다. “권사님 정말 멋졌어요. 광림교회 찬양이 제일 좋았어요. 정말 큰 감동 받았습니다.“ 그는 내가 한때 신앙생활을 하던 大成교회 (加平군 대성리 소재) 청년이었다. 그는 성악 전공자 못지않은 중후하고도 안정된 음성으로 성가대 베이스 파트 역할에 충실하던 젊은 대원이다. 준 전공자 수준인 그의 評은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우리 성가단원들이 듣기에 달콤하도록 아첨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나 역시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했다. 순간적으로 나를 아는 그 교회의 멤버들이 내게로 다가오면서 만면에 미소를 짓는다. 연로하셨어도 여인으로서의 미모를 잃지 않으신 박순옥 권사님을 비롯해서 권 권사님과 교회 임직 십 여 명이 함께 나를 반기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시간이 좀 지난 뒤에는 대성교회 담임이신 이형호 목사님이 다가와 수년만의 해후가 허그로 이루어 졌다. 그곳을 떠나고 만 5년이 지났다. 그 뒤로 오늘 처음 만났어도 어제 헤어진 듯 조금도 낯설지 않은 친근한 얼굴들이다. 흘러간 세월은 우리들의 관계를 숙성시킨 과정이었을 뿐 결코 소원해지는 뜨악한 시간은 아니었다. 비록 몸은 떠나와 있었어도 보이지 않는 인연의 줄은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예상치 않았지만 평소에도 잊지 못하던 그들을 만난 감격은 이번 성가제 에서 얻게 된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대성 교회는 가평군 대성리에 있는 작은 감리교회다. 그런데 부평감리교회와는 父子나 형제와도 같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낸다. 대성교회 담임목사는 원래 고향이 부평인데다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부평교회를 섬기면서 성장했고 교회의 장학생으로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한 연유로 해서 단독목회를 하는 과정에서도 두 교회는 친밀함을 초월한 부자와 같은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게 된 것이다. 대성교회가 성장하기 까지 경제적인 도움도 없지는 않았으리라는 추측을 하지만 확인된 바는 아니다. 이러한 특별한 관계로 홍은파 목사님은 행사 때 마다 대성교회 교우들을 우선적으로 초대하게 되었고 대성교회 성도들 역시 반드시 참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알고 지내고 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 궁금한 이야기, 그동안의 교회 형편 등 묻고 싶고 알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았는데 얼른 헤어져야 할 시간이니 저간의 인사를 다 나눌 수야 없다. 우리 멤버들은 지금쯤 대형 버스에 몸담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런지도 모른다. 반가운 마음은 그들 속에 남겨둔 채 기념사진 한 장을 찍어 정표로 삼고 그만 헤어져 내 갈 길로 갔다. 권권사, 그녀는 우리보다 십 여 년 이상 젊은 여인이다. 그녀는 대성리 민박 촌 입구 샛강 물가에서 캠프 시설을 운영하는 권사님이다. 해마다 7,8월에는 한두 번씩은 물난리를 겪어야만 한 여름을 지낼 수 있는 장소에서 그녀는 생업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항상 웃는 모습으로 교회와 마을을 위한 봉사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세가 퍽 감동스러운 여인이다. 여름이 익어갈 무렵엔 새콤달콤한 자두를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던 여인인데 우리가 그곳을 떠나오고 난 뒤에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 오늘의 만남이 더욱 반갑고도 인상적이었다. 수십 년 간 교회 청소는 물론 마을 골목길 까지도 깨끗하게 쓸고 다니시는 심 권사님. 매사에 의욕이 샘솟는 여자 권사님 인데 내가 그곳을 떠나오고 난 뒤에 장로 임명을 받아 가평군 장로회에서 열정적으로 일하고 계신 분이다. 대성교회가 탄생하게 된 동기는 1972년 이 여인의 사랑방에서 기도회로 시작되었다 하지 않던가. 먼저 소개한 베이스 파트의 청년대원과 결혼해서 수년이 지난 지금도 신혼처럼 살아간다는 새로 부임하신 미모의 여전도사님. 미국 유학이 끝난 長男을 현지 미 West Point에 합격시키고도 자랑하지 않는 중년의 신실하신 김 권사 내 외분 등. 손꼽자면 누구하나 잊히지 않는 형제들을 돌아보면 다시금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는 인생사가 아쉽게 느껴진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혼자 생각했다. 그들의 짧은 인사 한 두 마디에서 혹은 그들의 표정하나하나에서 묻어나오는 진정을 느낄 수가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 마을에 살던 십 년 가까운 날들 동안 그들로부터 받은 온정과 그리스도의 사랑은 실로 잊을 수 없는 소중한 나날이었다. 신앙생활을 하고 처음으로 경험했던 성탄절 새벽송의 축복을 받은 곳이 그곳이었고 대형교회에 비해서 또 다른 은혜와 사랑을 체험한 곳도 바로 대성교회와 그곳 성도들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누구에게 무엇으로 사랑을 나누었던가. 아무것도 베푼 것 없이 그들과 섞여서 우리 방식대로 함께 살아온 것 것뿐이다. 그러나 누군가 거북스러워 할 만 한 행동한 적 없으며 그 누구에게도 감정의 골이 들어나지 않게 생활했던 것은 평소의 내 모습과 별다름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시절 가끔씩 본교회 에서 예배를 드리고 귀가하는 길에 대성교회에 들러 점심 애찬을 함께 했던 일이 많았다. 그들과 더 가깝게 지내기 위했던 나름대로의 방법이었는데 이 같은 추억을 회상하는 그곳 담임목사님의 유쾌해 하는 표정을 보면서 그 작은 마을에서 살았던 시절을 그립게 떠올렸다. 귀하고도 소박한 그들의 인정을 가깝게 두고도 받아드릴 만한 가슴이 없어 그동안 소원하게 지내온 내 빗나간 자세가 얼마나 공허한 시절이었던가. 좀 더 다가가 귀한 우정 나누지 못했던 지난날을 자책 하면서 늦은 밤 귀가를 서둘렀다. 『부평감리교회 음악회에 참석할 인원이 태부족하여 남성 성가단의 모습이 크게 손상될 위기에 있어 도움을 청해 봅니다.』 위와 같은 문자를 보내주어 참석의지를 고취시켜 준 베이스 파트장 강용규 권사께 친밀함과 격려의 마음을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