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딸네 가족이 모두 왔다. 코로나로 인해서 3년도 넘게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다가 역병의 전파력이 약화되자 겨울방학이 시작되었고 이내 한국행을 서두른 것이다. 해외에 오래 머물다 모처럼 만난 가족들과 동해안 여행을 계획하고 강릉 어떤 리조트를 예약한 날이다. 지금쯤 떠나야 할 시간인데 전국적으로 눈이 내리고 있어 마음이 산란하다. 중장년 시절 눈길 교통사고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어 자꾸만 망서려 지기 때문이다.
집안에 어른이라고는 나뿐이다. 결정은 내가 하고 책임을 져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 역시 내가 져야 한다. 이 불안한 마음으로 자동차 여행을 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취소하고 집에 앉아 맛있는 별식이라도 해 먹으면서 창밖에 쌓이는 눈이나 감상하는 것이 나을지. 아들은 인터넷으로 고속도로의 교통상황을 검색하고 있는데 제설작업이 진행되어 소통하기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며 출발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다. 동해안으로 가는 양양고속도로를 살펴보니 동쪽으로 갈수록 길은 오히려 검은색으로 변해 아무렇지도 않게 통행하는 영상이 눈에 보인다. 그런데도 우리 집 창밖으로는 계속해서 눈이 내려 쌓이고 있다.
전국적으로 대설이 예보되었어도 곳곳마다 상황은 다르니 기상청 예보도 완전 믿을 수는 없나 보다. 안전하게 집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다소 불안하더라도 길을 나설 것인가. 어느곳이나 민주사회에서 대개의 선택은 자유롭게 이루어지지만 어려운 것중 하나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자유다. 오늘을 기다린 아이들에게는 안됐지만 다음에 좋은 기회에 다시 가기로 하자고 포기 선언을 했다. 손자아이들의 실망이 여간 아니다.
떠나기를 취소했어도 시선은 쉬지 않고 창밖을 향한다. 어떤 때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다가 또 잠깐 사이에 산발적으로 약한 눈발을 날리고 있는 날씨를 하늘에서 주관하고 조정하겠지만 한번 따져 물어보고 싶다. 『어떻게 할 작정이시오? 눈을 그치게 하던가 더 많이 내려서 포기하게 하던가 확실하게 해 주시오.』 하늘에서 내 말을 듣는다면 대자연의 섭리에 대한 불만을 들어 괘씸죄나 신성을 모독한 죄로 엄하게 다스릴 것이다.
계속해서 인터넷 일기예보를 확인하던 아들이 스마트 폰의 화면을 내게 보여준다. 경춘 고속도로 화도 IC에서부터 영상이 발표되는 현장 사진은 안전하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영서지방에 이르는 도로가 하얀 백설로 덮여 있을 줄 알았는데 점점 검은색으로 변하고 있다. 그만큼 눈이 쌓이도록 내리지 않았거나 내렸다 하더라도 이미 치운 관계로 그리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
아파트 밖으로 나가 실제 눈을 맞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기로 했다. 주차장에 내린 눈은 쌓이기도 하지만 자동차 왕래가 빈번한 곳은 녹아 있거나 점차 녹아들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눈이 멈추기를 바라는 염원이 간절하기에 일으키는 착시현상인지도 모른다. 내가 밖에 나와 오래 지체하니까 손자 녀석들은 출발하는 줄 알고 짐을 메고 내려온다. 아내나 아이 어멈까지도 출발하는 것으로 알고 주차장 까지 나와서 자동차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아직도 세상 살아가는 일에 미숙할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정에서는 가장 연장자이며 족장(族長) 이기도 하니 과감한 결정도 필요하다. 그래 떠나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다. 아이들이 모두 내려와 2대의 자동차에 타고 앉아 떠나기를 기다린다. 나 역시 차를 타고 앉았다. 이렇게 결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출발했는데 『아빠는 3급』 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을 얻게 되었다.
춘천 가는 자동차 전용도로에 들어섰다. 이제는 되돌아갈 수가 없는 지점에 이른다.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 듯 말한다. 그래 영동 쪽 운행이 위험한 이유는 고갯길 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대관령과 한계령은 이미 터널 화 되어 오히려 더 안전한 주행도로가 아니던가. 눈 내리는 경춘 고속도로를 조심조심 달려 잦은 폭설로 유명한 지점 둔내 터널도 지났다. 양양 가는 도로가 폭설로 차량왕래가 두절된 것으로 예상했는데 아스팔트가 보송보송 말라있고 하늘마저 청명해진다. 제동 거리 확보할 것도 없이 다른 차를 견제할 것도 없이 고속으로 달려도 아무런 위험요소가 없다. 영서지방을 지나 한계령을 터널로 지났다.
강릉에 도착했을 때는 푸른 하늘에 맑은 태양까지 우리들을 반긴다. 폭설로 인한 설해를 얼마나 걱정했던가. 바닷바람은 매워도 예약했던 리조트, 쾌적하고 넓은 2곳의 침실, 따듯한 거실과 주방 그리고 화장실 둘.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조건으로 이틀간을 참 편안하게 지냈다. 눈으로 인한 피해가 한낱 기우로 끝나고 편하게 쉬면서 아내가 나에게 붙여준 별명을 때때로 곱씹어 본다.
실은 출발하기 전에 나는 날씨를 실감하기 위해서 주차장으로 잠깐 나왔던 것이 아닌가. 잠시뒤 조바심을 내던 아이들이 따라 내려왔고 나 역시 순간적으로 결정하고 출발을 서둘렀던 것이다. 그런데 중대한 내 실수는 바로 이때 벌어졌다. 준비물을 담아놓은 배낭을 그대로 집에 두고 출발한 것이다. 되돌아 나갈 수 없는 자동차 전용도로에 들어서자 깨달았지만 U턴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 목적지까지 직진하게 된 것이다. 이 내용을 알게 된 아내는 “아빠는 3급 수준이니 어쩌면 좋으냐?” 라며 깔깔 웃는다. 딸들도 따라 웃고 나는 어이없는 실수에 허탈감마저 들었다.
우리는 복지법인과 연관이 있는 가정이다. 따라서 지적 장애의 급수와 정도를 이해하는 데는 익숙한 편이다. 지적장애 3급이라면 만 6세부터 8세까지의 지능지수인 IQ 50~69에 해당함을 말함이며 간단한 심부름이나 단순작업등을 할 수 있는 수준을 말한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준비한 잠옷외에 세면도구와 간단한 소지품등을 두고 몸만 떠나온 꼴이 되었으니 지적(知的) 장애 3급이라는 판정을 받을 만하다며 나 역시 웃고 말았다.
그런데 내가 비록 3급이라 해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아내는 가끔 식사 시간을 놓쳐 시장기를 느끼게 되면 저혈당으로 온몸에 기운이 빠져 걷는 것조차 힘들어 할 때가 있다. 가지고 있는 당분이나 간단한 먹거리로 일단은 해결하지만 여의치 않은 경우 위독한 지경에 까지도 이를 수 있다. 내가 차를 운전하고 먼데를 함께 갈 때 발생한 적이 많다. 무심하게 운전만 하다가 결국 아내의 도움요청을 받고서야 알게 된다. 이것은 아내를 생각하는 세심한 마음이 3급 수준을 벗어나기 힘든 탓이다. 다른 것에는 깜빡깜빡 하더라도 아내의 떨어지는 혈당에 대하여는 결코 3급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각오를 다지며 살아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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