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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수필

[수필] 한단지몽 (1,2차 퇴고 완료. 고친부분 출판사와 비교할 것)

  초가을 아침 산책길이 상쾌하다. 연보라색 구절초 꽃잎이 무리 지어 피어난 천마산 등산로를 분주하게 걷는 젊은이들이 있는가 하면 노년들은 체력을 조절하면서 천천히 오르내린다. 9월 들어 더위가 물러가고 산길 걷는 이들이 늘어났다. 침엽수 우거진 숲 속에 청아한 산새 소리가 심신을 맑게 해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걸을 때 숨이 가쁘고 가슴에 가벼운 통증을 느끼게 되었다. 병원을 찾았더니 협심증 이라는 진단을 받아 약을 복용하고 있다. 그 후 걷기 운동으로 심혈관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나부끼는 나뭇잎과 맑은 햇살속을 땀이 날 만큼 걷다가 내가 정해놓은 반환점을 돌아 다시 내려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호만천 흐르는 물이 발을 담그고 싶도록 맑다. 지난여름의 끝자락 기상 관측 이래 처음이라는 폭우로 서울 강남의 도심이 흙탕물에 잠겼어도 이 고장은 아무런 피해 없이 시냇물만 풍성해졌다. 천마산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골마다에서 흘러든 물소리의 청량함이 내 안의 정서를 만족시켜 준다.

  무덥고 습기 많은 날이 오래 지속 되던것에 비하면 여름은 싱겁게 끝났다. 처서를 지내자 하늘도 구름도 바람도 넉넉한 냇물도 쾌적하게 가을을 맞았다. 천천히 걸어 집으로 가는 길에 그늘이 있는 냇가 벤치에 앉아 잠시 쉬는데 간간히 부는 바람이 반팔 소매 위로 소슬하다. 안식 같은 만년이 굴곡 없게 이어지는 것이 감사하다. 노년에 이르러 평안함 보다 더한 복락이 어디 있으랴.

  그런데 아까부터 마음 한편에 석연치 않은 감정 하나가 나를 따라오고 있다. 협심증 진행으로인한 은근한 걱정인것같지만 그것만도 아니다. 한결 시원해진 대기와 정갈하게 조성된 걷기 편한 길옆 돌 틈으로 흐르는 넉넉한 수량(水量)의 개울 물 등 자연조건에 의해 시청각의 느낌은 쾌적하다. 자유로운 마음과 편한 자세로 앉아 쉬기를 원하나 멈추지 않고 따라오던 서글픔 같기도 한 감정 하나가 내가 쉬는 벤치까지 따라와 함께 앉는다.

  『임종과정에 이르렀다는 의학적 판단을 받은 환자가 되었을 때 무의미하게 생명을 연명하기 위한 치료는 받고 싶지 않다는 선생님의 뜻을 등록하는 것이에요. 회생 가능성이 없는 말기 과정에 계신 환자들에게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수혈, 체외 생명 유지 술, 혈압 상승제 투여 등 치료 효과 없이 임종 과정의 기간만을 연장하는 것에 반대하신다는 본인의 의사입니다.』 사십대로 보이는 젊은 담당자 여인은 퍽 조심스럽고도 겸허한 표정으로 우리 부부에게 설명했다.

  『사전 의료 연명 의향서』라는 제도가 있다는 말은 오래전에 들어 알고 있었다. 평소에 관심이 있어 상세한 사항에 대하여는 더 물을 것도 없이 이해했다. 죽음을 앞둔 순간 마지막 결정인 그와 같은 제도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뿐 아니라 다른 이 들에게도 권유하고 싶은 내용이었다. 결국 어제 오후에 그 서류에 서명했으나 주변의 친지들이나 내가 아는 다른 어른들은 이미 실행에 옮겼거나 의학 수련생들의 학습을 위해 사후(死後) 시신기증까지도 약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게 그리 급한 일은 아니라고 여겨왔다.  즐겁거나 유쾌한 일은 더욱 아니었기에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언제라도 해야 할 일이어서 편한 날 편한 시간에 관계 기관을 찾자고 아내와 약속한 지 수년이 지났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실행에 옮길 만한 기회는 줄어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까지 건강하게 살아온 것은 내가 노력을 했거나 건강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운이 좋아 지금까지 버텨 온 것뿐이니 그 때는 의외로 머지않은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지지난 달 멀쩡하던 친구 하나가 갑자기 세상을 등졌다. 나와는 동갑이며 평생을 가깝게 지내던 그가 아무런 작별인사도 없이 떠나고 나니 죽음이나 죽음의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남은 내 시한이 그리 넉넉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하게 되었다. 죽음에는 순서도 시기도 형태도 알 수 없는 것이 고도로 발달한 지혜로운 현생인류의 우매(愚昧)함이 아닌가. 남은 인생길에 대하여 깊게 생각해본 적도 없는것 같은데 어느새 마지막 준비를 염두에 두어야 할 때가 오고 말았다.

  한단지몽(邯鄲之夢)이라는 고사를 읽은 적이 있다. 당나라 현종 때 하북성 한단(邯鄲)이라는 고장의 한 주막에서 행색이 초라한 젊은 노생(盧生)이 도사 여 옹(呂翁) 앞에서 신세 한탄을 하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명문 가문의 여인과 혼인하고 출세와 좌절의 굴곡진 삶을 살지만 재기의 기회를 얻어 아들과 손자들을 거느리고 부귀영화를 누린다. 한평생을 그렇게 행복하게 살다가 80년의 생애를 마친다. 꿈에서 깨어난 노생의 옆에는 도사 여옹이 여전히 앉아있고 주막집 주인이 짓고 있던 기장밥도 아직 다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는 고사다. 여옹 도사는 젊은이를 향해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네.” 라며 껄껄 웃는다. 인간의 삶이란 한낱 꿈과 같이 허무하게 지나간다는 일깨움일 것이다. 나 역시 노생처럼 길지만 짧은 시간 꿈꾸듯 살아온 것 같은데 어느 순간에 80 생애를 지내왔다. 

  높아진 하늘을 쳐다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라고 변명해 본다. 하지만 나는 과연 거리낌 없이 그때를 맞이할 수 있을까. 마지막 때의 상황이 어찌 될는지 모르나 어쩌면 때가 이르러 연명치료를 거부하게 될 날은 분명히 오고 있을 것이다. 초가을 날씨처럼 내 삶의 여정 끝날 까지 산뜻하게 살아가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나를 따라오던 어두운 감정의 덩어리를 흐르는 물속에 그만 던져 버리기로 하자 마음도  조금씩 가벼워 졌다.  끝

                                                                2022. 9. 16

내고장 남양주천마산 중턱에서 바라본 잠실지역의 풍광. (먼곳)

소음속 도심의 혼잡함도 여기서 보면 조용한 그림의 한 폭이다.

남양주에서 바라본 서울 지역의 해넘이 광경.

인수봉 백운대 너머로 해는 지고 세월도  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