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檀園) 김홍도의 작품 중에 도강도(渡江圖)라는 그림이 있다. 먼 듯 가까운 듯 강안(江岸)으로 작은 언덕이 보이고 선객을 태운 나룻배 한 척이 물살을 가르고 있는 그림의 상단에 시 한 편이 실려 있다.
東湖春水 碧於籃 白鳥分明 見兩三 (동호춘수 벽어람 백조분명 견양삼)
동호의 봄물은 쪽빛보다 푸르고 또렷하게 보이는 것은 두세 마리 해오라기
柔櫓一聲 飛去盡 夕陽山色 滿空潭 (유노일성 비거진 석양산색 만공담)
노 젓는 소리에 다 날아가고 노을진 강물위로 석양의 산색이 가득하구나.
이 시의 작가는 조선중기 초부樵夫라는 가난한 노비의 신분이다. 그의 본명 정봉鄭鳳(1714~1790) 이라는 이름이 있었지만 초부라고 불리어 지기를 원했다. 그가 쓴 시 동호범주의 시적 감흥과 그의 신분에 천착穿鑿하게 되니 식생활의 해결 방법이 막막했을 한 늙은 초부樵夫의 참담한 생활이 눈에 보이는 듯 측은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근래 초부 시인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그의 시가 읽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고즈넉한 석양 무렵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에 마음까지도 노을빛에 젖는다. 이름이 아닌 나무꾼을 뜻하는 樵夫시인은 노비의 신분으로 상전댁을 위해 땔나무를 하러 오가며 마을 앞 강물과 그 물위에 붉게 물들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 감성적 느낌으로 이 시를 구상 했을 것이다.
김홍도가 이 시를 자신의 그림에 올려놓았다. 조선 4대 화원 중 (安堅 金弘道 鄭敾 張承業) 한 분인 단원 김홍도의 감성을 자극 했을 시 한편으로 영감을 얻은 그가 푸른 물살을 가르며 강을 건너는 나룻배를 바라보면서 도강도 라는 작품을 그렸을 것이다. 초부의 시 『동호범주』는 맨 처음 시작부분인 東湖를 高湖라고 바꾸어 쓴 것 외에 한 획도 틀림이 없다. 그 이유에 대하여는 정확하게 알 길 없으나 단원이 본 앞 강물에 대한 정경을 시인의 높은 안목과 고결한 시정에 실어 高湖라 표현 했을는지도 모른다.
연전에 역사 스페셜 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본적이 있다. 노비신분의 시인이 살고 간 궤적을 추적하는 과정이 퍽 감동적이었다. 여춘영呂春永(1734~1820)의 노비로서 시를 쓰며 살던 곳, 청탄 靑灘 이라는 고장이 우리 가정과 연緣이 있어 역사 속을 거니는 것 같은 감회에 젖게 한다. 그곳은 내 외가 마을과 인근일 뿐 아니라 어머니 유택幽宅이 있는 곳이라 성묘 때 외에도 수시로 오고가는 곳이다.
어머니가 5,6세 되던 무렵에 마을에서 학식이 높고 가문이 융성한 여呂씨 어른의 무릎에 앉아 한문 공부를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역사 스페셜에 의하면 呂씨댁의 내력을 증언하는 그 가문의 후예 한 분이 출연하여 자신이 呂春永의 6대 손이라고 소개를 했다. 어머니의 연세를 고려할 때 한학을 가르치시던 어른은 여춘영의 3대손이며 초부와 함께 시문학을 공부했던 여춘영은 조선 숙종조 문과에 급제하고 영의정을 지내신 여성제呂聖濟(1625~1691) 어른의 직계후손인 것을 알게 되었다.
노비 시인이 나무꾼으로 살던 수청리 라는 마을은 내 외가에서 강변길 포장도로를 달리면 지척의 거리다. 댐으로 호수가 조성되기 전인 70년대 중반까지는 마을 앞으로 청정수 남한강물이 흘렀고 백사장의 모래밭은 꿈길처럼 신비로웠다. 초부 시인이 바라보던 한강의 붉게 타오르는 듯 한 저녁노을은 시상을 떠올리게 하는 영감과 붓을 들고자 하는 의욕을 주기에 충분 했을 것이다.
단원의 도강도에 올려 있는 시는 노을에 물든 강물과 그 위를 나르는 해오라기 서너 마리에 시선을 두고 서정적 감성으로 썼을 것이다. 넓은 호수로 변한 이 강의 물결과 가물거리는 두물머리 늙은 느티나무위로 황혼이 질 때면 시인이 아니더라도 시상에 잠길 만 한 풍경을 연출하는 곳이다.
초부 정 시인은 여춘영의 배려로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良人이 되었다. 그의 신상을 소개하는 역사스페셜에서 보면 그는 면천은 되었더라도 그의 나뭇지게에 가난을 숙명처럼 지고 다녔다. 오히려 노비생활에서 벗어난 뒤에는 더욱 심한 가난으로 곡기를 끊을 수밖에 없는 참담한 처지에 놓인 적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갈대가 우거진 갈대울 이라는 마을에 살았다고 했다. 그곳은 지금의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부근인데 초부가 노비로 살던 수청리 에서 강물을 건너면 곧바로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서울 홍천간 국도가 고속화되기 전 까지는 갈대숲 사이로 초가마을이 조성되어 있던 곳이다.
초부는 76세로 일생을 보냈다. 그가 태어나서 평생을 비록 나무꾼의 직업 외에는 선택할 일이 없었어도 당대에 저명한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 형제들과 교우했으며 연암 박지원, 豹岩 강세황 등 지식인들의 시집에 그의 시가 다수 수록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비록 가난은 면치 못했어도 높은 식견의 문학적 교류로 인해서 고결한 삶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 영 정조 시대 붕당정치와 4색당파간의 세력다툼으로 혼란스럽던 세태는 지금과 별 다름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천민이라는 그의 신분으로 보아 정치적 시대상과는 무관한 처지였을 터이니 차라리 높은 이상으로 고매高邁한 시작 세계에만 몰두 할 수 있어 정신세계가 끝내 행복 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비의 신분을 벗어난 중년이후에도 가난을 면치 못하여 늘 허기에 지쳐있었을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가 만약에 시를 쓰는 능력만큼 보부상에라도 능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더라면 큰 재물을 손에 넣어 부유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았을까. 三朝辟穀 未成仙( 삼조벽곡 미성선. 아침세끼 곡기를 끊은 것은 신선이 되려 함이 아닐세.) 라며 사흘씩이나 굶은 허기진 절박함을 노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 추석에 성묘 하러 선영에 내려갔었다. 고향을 떠나지 않은 오랜 친구가 있어 여씨 가문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노비의 인권을 회복 시켜 주었고 주민들에게는 수학 할 수 있도록 터전을 제공했던 여춘영의 후예들은 어디론가 이주한 후 어떠한 소식도 모른다고 했다. 비록 그들이 조상 때부터 살아온 고장을 떠나갔다 하더라도 갸륵한 그때의 선행은 역사에 남아 초부의 시와 함께 오랫동안 기억 될 것이다.
당시 인권이 아닌 마소와도 같은 재산 가치로 인정하는 노비의 존속문서를 불태워 버리고 면천 시켜주었다던 가문, 부리던 노비를 자신의 아들과 함께 공부 할 수 있도록 배려한 인간존중 사상은 수세기를 앞서가는 수준 높은 사랑의 실천 이 아닌가.
여춘영의 조상이며 영의정을 지내신 여성재(呂聖齋) 어른의 묘는 오늘도 수청리 마을을 지키고 있다. 덧없는 인생사 한낱 구름처럼 흘러가 버렸어도 근현대사에 있어 큰 족적을 남긴 몽양 여운형을 탄생시켰으며 그날에 뿌려놓은 인성의 씨앗은 지금도 남아 후세에 감동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강물 위를 노닐던 그날의 해오라기는 어디로 날아갔을까. 나뭇짐 보다 더 무거운 가난을 지게 가득 짊어 졌어도 맑은 영혼으로 문학적 이상을 실현했을 나무꾼 시인. 그와 함께 시문학을 공부하던 여춘영 어른도 아득한 옛날에 이 세상을 떠나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다. 呂씨 어른의 무릎에 앉아 한문 공부를 익히시던 어머니의 유년시절은 어느 하늘로 가뭇없이 날아갔는가. 마음을 울리는 노비시인의 동호범주(東湖柉舟) 시 구절은 단원의 도강도 그림 속에서 두고두고 감성적으로 이어질 것이다. 늙고 가난했지만 그토록 시를 사랑했던 초부의 영혼을 위해서 오늘 저녁 향불이라도 올려 위로해 드리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