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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수필

[수필] 수채화 한 폭 (1,2차 퇴고 완료)

  ‘경안천京安川에서 피라미를 잡아 생선회를 먹을 때 안주용으로 풋고추를 따곤 하였다. 주인이 구슬땀을 흘려가며 지은 고추농사를 불법으로 약탈(?)해가는 이 불법침입자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친구 분들이었다. 내가 이따금 밭에 나가 망을 보지만 그 나쁜(?) 침략자들은 주인의 엄중한(?) 감시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바구니에 수북이 풋고추를 따가곤 하였다.’

   위 글은 장로신문에 칼럼『신앙산책』을 연재하는 문정일 장로가 70년 전쯤의 기억을 더듬어 선친을 회고하며 쓴 글이다. 이 부분만 읽으면 불법으로 고추를 따 가는 범인을 정말로 성토하는 내용처럼 보이지만 그건 아니다. 가난했어도 따듯한 인정이 오가던 시절 고추 몇 바구니 약탈(?) 당한 것으로 인해 섭섭해 했던 어린 아들의 마음에 ‘그래도 우리가 더 많은 고추를 먹게 될 테니까 속상해할 것 없다.’ 인간이 지녀야 할 선한 심성인 나눔의 가치를 심어주신 아버지께 고마운 마음을 드리는 글이다.

   내가 열 살이 채 안될 무렵이었지 싶다. 유년기의 기억인데도 많은 사건들이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은 6.25 전쟁의 참혹했던 한 면을 온 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휴전으로 전투는 멈추었어도 마을은 폐허 속에서 복구되지 않아 혼란하고 궁핍하던 시절이었다. 피난에서 돌아온 가정들은 가족 중에서 누군가가 폭격에 맞아 유명을 달리했거나 살던 터전 전체가 불타 흔적 없이 사라져 막막한 집이 많았다.

  이웃들이 만나면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각자가 겪은 동란 중 힘들었던 사연을 주고받았다. 많은 어른들은 붉은 치하에서 부역을 했던 사실로 죄과를 문초 당했고 더러는 후퇴하는 인민군에 끌려간 채 소식이 끊기기도 했다. 후미진 골짜기에서 적군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보이는 시신의 무리가 발견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마을은 분노와 절망에 휩싸였고 소식 없던 가족의 시신을 학살의 현장에서 찾아낸 경우도 있었다. 시신이 훼손되어 입었던 의복이나 인체의 특성 등으로 가족임을 확인하고 소달구지에 싣고 마을로 돌아오던 참상은 평생 지워지지 않는 아픈 흔적으로 남아있다. 장례를 치르며 슬픔까지도 함께 묻어 버리고 남은 가족들은 또 다시 치열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우리는 피난길에 총알이 빗발처럼 쏟아지는 골짜기에서 살아나온 경험을 했다. 총탄이 우리를 피해 가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는 긴박한 상황에 몰렸었다. 서른 명 안팎의 피난민 대열이 산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을 때 불현듯 산 위에서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은 총성과 함께 탄알이 쏟아져 내렸다.

  우리 가족은 다급한 상황에 등에 지고 가던 솜이불을 덮고 그 안에라도 몸을 피했다. 그 위험한 중에도 바깥이 궁금하여 이불 밖을 내다보면 빨간 불덩어리가 사선을 그으며 쏟아져 내렸고 땅에 박히는 총탄의 충격으로 부서진 흙덩어리는 우리가 덮고 있는 이불 위에 쌓였다. 중공군과 미군이 대치해 있던 접전 지역을 몇몇 가족들이 피난 경로로 지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두운 밤이었기에 미군들은 피난민의 대열을 적군으로 오인하여 사격을 했던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미군 병사들의 목소리가 들렸고 ''헬로!!!'' 라는 우리의 부르짖음으로 마침내 구조될 수가 있었다.

  은폐할 곳 없는 접전의 현장, 피아彼我의 중간지대 총탄 속에서도 우리 가족은 무사했다. 그날의 엄청난 사건을 되돌아볼 때마다 어머니는 우리 남매들에게 하는 말이 있었다. “사람은 착하고 바르게 살아야 하느니...” 어린 나이였어도 나는 아버지가 착하고 정직하게 사셨기 때문에 온 가족이 무사히 살아 나온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날 많은 아버지들과 엄마들 그리고 어린이들까지 죽음을 피하지 못해 일행 중 절반 정도가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그다음 날 현장을 찾은 유가족에게 들어 알게 되었다.

  적 치하의 3개월간 좌익분자 누군가가 면사무소 창고에 쌓여있는 쌀가마니로 아버지를 회유했다. 내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결코 받지 않으신 아버지는 치안이 회복되고 여적 죄를 밝힐 때 오히려 정직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우리는 비록 가난했어도 전쟁으로 인해 인명에 피해 없었던 것에 감사하면서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내가 알기에는 꼭 한 번, 아버지는 우리 것이 아닌 남의 물건에 무단으로 손을 댄 일이 있었다.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던 시기였을 것이다. 우리 가족은 모처럼 경안천 냇가로 가족 나들이를 나갔다. 어머니는 광목廣木 (무명 올로 폭이 넓게 짠 천) 한필을 햇볕에 탈색하기 위해서 양잿물에 삶아 빨아 널기를 반복하고 아버지와 우리 남매들은 흐르는 냇가에 발을 담그고 다슬기를 잡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전쟁과 가난한 생활로 찌들어 지내시던 어머니의 모처럼 밝은 모습은 식생활이 조금은 나아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준비해 간 쌀로 밥을 지었고 된장을 풀어 다슬기 국물 요리를 만드신다. 찌개가 끓는 기미를 보이자 인근의 밭에서 풋고추 한 움큼을 따고 물에 씻어 손으로 대충 자른 뒤에 다슬기 찌개에 넣어 맛을 내신다. 우리 소유가 아닌 밭에서 함부로 농작물을 취해 오는 것은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우리 남매들이 느끼는 불편한 심기를 이미 아시는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 괜찮다. 저 고추밭은 아버지 친구의 밭이라 나중에 양해를 구하면 된다.” 라며 우리를 안심시키셨다. 경안천 넓은 냇가에 해가 지고 서쪽 하늘에 빨간 노을이 물들 때까지 온 가족이 천렵을 즐긴 그날의 기억이 정지된 그림이 되어 그리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아버지는 1906년 丙午생이며 생존해 계신다면 올해 117세가 되신다. 문장로의 부친께서는 1910년 庚戌생이라 하니 아버지와는 한 마을에 살면서 호형호제 했거나 친구 관계로 지내셨을 것이다. 우연이 일치가 되어 "그 밭이 바로 그 밭" 이었다면 아버지께서도 고추밭의 약탈자로서 일말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만약 두 분의 영혼이 우리 곁에도 내려와 이 글을 읽으신다면 착하고 정직하게 사신 분들답게 아름다운 추억이었다며 조용하게 미소 지을 것이다.

  그날의 다슬기 국물은 지금도 혀에 감칠맛으로 남아있다. 밭에서 고추를 따고 손으로 분질러 넣으시던 젊은 아버지와 물가에 둘러앉은 우리 어린 남매들의 모습이 수채와 한 폭이 되어 내 인생의 노을 속에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끝.

                                                                                                 2022.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