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가 사라져 가고 있다. 여의도 면적의 몇 배가 묘지로 침식당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우려는 장례문화가 바뀜으로 빠르게 해결되고 있다. 나라에서 염려하고 국민들이 불안해하던 전 국토 묘지화라는 문제점은 지난 세기의 과거사가 되었다. 국가나 개인이나 시대가 흐르면서 변화하고 앞으로 나아가며 발전한다.
전에는 외진 지역이었던 곳에 도시화가 이루어진 경우가 많다. 국토를 개발하다 보니 산 속에서 외롭던 묘지가 사라지거나 인가 근처까지 내려와서는 산 자의 편의로 끝내 없어지기도 했다. 두 번 죽음이라는 당치도 않은 이유로 화장을 꺼리던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 것이 묘지를 없애는데 큰 역할을 했다. 장례에 관한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전에 비해서 화장율은 91.8프로에 이르게 증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된지 오래되어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된 묘를 열어 화장으로 모시고 그 잔재를 날리거나 평토장으로 모신 경우를 감안한다면 화장건수의 수치는 더 늘어날 것이고 국토는 그만큼 넓어졌거나 넓어지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사후문제를 이렇게 유언 하셨다. “나 죽거든 땅에 묻지 말고 화장을 해 주게.” 그러나 그야말로 어머니를 두 번 죽여서는 안 된다는 어설픈 효심에 의해서 유언을 들어드리지 못했다. 처음 몇 해 동안은 년 2회에 걸쳐 잡초를 깎고 다듬어 유택은 언제나 질 좋은 잔디의 모습이 매끄러워 보기에 좋았다. 그러나 십년이 지나고 이십년이 가까워지면서 부터는 우리 살아가는 세상일이 우선이 되어갔다. 6월과 추석 전, 1년에 두 번씩 봉분과 주변의 잡초를 뽑아내고 다듬어 정리한다는 것이 마음속에서 울어나는 효도가 아니라 힘들고 번거로운 의무이며 노동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나 역시 노령에 접어들어 기력이 부치는 현실에 직면하고 보니 이 어려움을 자식에게 까지 물려주지는 말아야 한다는 합리적 명분마저 찾게 되었다. 한마디로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그만 끝났다는 증거였으며 화장을 하라 시던 어머니의 유언의 말씀을 곰곰이 되새겨 보게 되었다.
선친께서는 60년대 초에 작고하셔서 망우리 공동묘역에 모셨다. 양친께서 죽음 이후에는 거리를 두고 묻히면서 오랜 세월이 흘렀다. 부모를 장사함에 있어서의 매장을 하되 반드시 합장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이 효의 기본이며 부부라는 인연의 완성이자 종결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그 해 4월에 윤달이 들어 山役이나 유택에 대한 개보수를 하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을 것이라며 우리에게 권하는 이가 있었다.
아내와 상의를 거처 그해 여름 오래된 아버지의 묘를 열었다. 반세기 이상의 긴 세월 肉脫되신 아버지를 화장으로 모셨다. 한줌의 재로 변하신 아버지의 육신을 받아드는데 무심할 수가 없다. 성숙하지 못한 십대 어린시절에 어른들의 결정에 따라 서울이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에 아버지를 묻고 내려가면서 수없이 뒤돌아보던 내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그때의 참담함은 하루도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슬픔뿐이었는데 많은 시련과 연단의 시절을 견디면서 용케도 여기까지 왔다. 같은 시각에 어머니도 누우셨던 유택(幽宅)이 열리고 화장의 예를 거쳐 한줌 재로 변했다.
승용차 운전석 옆자리에 아버지를 모시고 나는 핸들을 잡았다. 6월의 태양이 작열하는 산길을 내려와 포장된 국도를 달려 어머니 머물고 계시던 산기슭을 향해 달린다. 60년도 더 지난 철모르던 시절에 장례 車에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묘지로 향하던 때에 느끼지 못했던 감회가 울컥하며 나를 섧게 한다. 예상치 못한 불운으로 낙심하시던 아버지가 떠오르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어린 아들에게 가문과 호주(戶主)만을 상속하고 떠나시던 그날의 아버지는 편하게 눈을 감으셨을까.
6.25 피난에서 돌아와 아무것도 없던 시절, 아버지는 여름철 밭에 심겨진 김장용 배추를 입도선매(立稻先買)의 방식으로 구입해서 김매고 북돋아 과연 상품가치 있는 채소밭으로 일구셨다. 내일 모레면 서울까지 운반해야 할 트럭 여러 대와 작업인부까지 다 수소문해서 만반의 준비를 마치셨다. 그 해의 김장용 채소의 가격이 예상외로 높게 책정되어 밭에 심겨진 배추를 매각했을 때의 이익금이라면 우리의 삶이 수직으로 상승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푸셨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예고 없이 닥친 때 이른 한파로 너른 배추밭은 얼음판으로 변하고 말았다. 당연히 많은 손해를 피할 수 없었고 아버지의 건강은 점차 나빠지기 시작했다. 어렵게 찾아왔던 몇 번의 기회는 예상치 않은 고비로 아버지를 괴롭혔다.
어머니 무덤이 있던 산자락에 노을이 붉게 물들어갈 무렵 양친께서 해후하셨다. 어머니는 평소에 즐겨 입으시던 백목련 빛 명주저고리 같은 하얀색 한지에 곱게 싸여 아버지를 기다리신다. 영혼이 떠나 물체일 뿐인 두 분의 인생 한 시대를 구상나무 아래 곱게 뿌려드렸다. 흙으로 덮기도 하고 더러는 산자락을 휘도는 바람에 날리기도 해서 주변으로 흩어지기도 한다. 육신이 누우시고 근 60년을 기다리시던 아버지께서 이제야 어머니와 만난 것이다.
“이른 나이에 대책 없이 떠나간 무심한 양반아” 라고 첫마디를 건네신 어머니에게 “나 없는 동안 부끄럽지 않게 살아준 것 고맙네.” 라고 화답하셨을 것 같다. 두 분의 해후로 이제는 영원한 세월을 함께 하실 줄 믿으니 후손된 도리중 하나라도 이룬 것 같아 가슴 속으로 흐뭇한 마음이 솟는다. 끝.
2023년 수필문학 추천작가회 사화집계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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