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꽃시장
어제는 오래 걷는 따이오 (大澳) 관광으로 피곤했다. 낮 시간에 잠시 눈을 붙인 탓에 정작 잠자리에 들어서는 생판 불면으로 밤을 지냈다. 한참 누워있어도 잠이라는 귀한 벗은 내게로 찾아오지 않는다. 이와 같은 현상이 노년의 대표적 불편함일 것이다. 신경 안정제를 먹으면 금방 잠들 수 있지만 끝내 참다가 새벽 4시를 넘기고 좀 잤다.
그래도 아침 여덟시에는 눈이 떠지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하루가 열린다. 식사는 집 식탁에 앉아 좀 느긋한 마음으로 받았다. 기름진 현지 음식이 아니라 집에서 일상으로 먹는 담백한 메뉴로 뜨겁고 짭짤한 우리 음식을 먹고 나니 속도 마음도 편해진다. 외출계획이 없어 한갓진 마음으로 바다경치나 감상하려는데 아내의 손전화가 울린다.
인근 아파트에 사시는 홍콩 할머니다. 그와 함께 몇 마디 주고받더니 오늘 점심은 침사추이 몽콕(旺角)으로 맛있는 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한다. 관광여행이란 별난 것 먹고 즐거운 경험으로 추억을 만들자는데 의미가 있다며 외출을 서두른다. 업무적인 그 무엇을 익혀야 하고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는 사무처리가 아니고 가볍게 즐기며 쉬는 것이 여행이며 관광의 목적인 것은 맞는 말 같다. 흔쾌하게 동의하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집 앞 버스정류소 에서 21D 버스를 타고 한 시간쯤 걸리는 시내로 향한다. 몽콕 경찰서 앞, 지하철 王子驛 근처에 내려 혼잡한 구시가지 길을 걷는다. 이미 점심시간이 되어 그런지 음식점 문 앞에는 이미 몇 명의 젊은 손님이 줄을 이루어 기다리고 있다. 우리 역시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한참 후에 들어와도 좋다는 손짓 사인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 음식의 현지 이름이야 어찌 기억할 수 있으랴. 꽤 맛난 국물에 쌀국수 면발이 낯설지 않은데 잘 다듬어 칼질한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넉넉하게 들어있어 비주얼이 식욕을 자극한다. 한 그릇의 양도 질도 가격도 말하자면 가성비가 좋은 음식이다.
식사비는 홍콩 할머니가 계산한다고 하니 나는 다음 기회에 답례하면 된다. 그녀는 젊은 시절에 온 가족이 이곳으로 이주해 왔는데 큰 사업을 경영하던 남편은 일찍 작고하셨고 지금은 두 남매를 의지하면서 소박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한 때 무엇도 부럽지 않은 생활을 누렸다는 사실은 그녀의 생활수준이나 지난날을 회상하는 추억담 속에 다 들어있었다. 그래도 고국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기 때문에 한국에 사는 우리와 자주 연락을 주고받으며 하나님 섬기는 권사로서의 신앙생활에도 열심을 보이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
딸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아내와 알게 되어 노년의 우정을 나누며 지낸다. 그녀는 웬만한 현지어는 물론 풍습과 사회적 규범에도 밝아 함께 다니면 큰 도움이 된다. 그녀의 정치적 성향은 보수성이 강한데다가 나라걱정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아 현 정권에서 주관하는 온갖 정보를 국내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역으로 퍼 나르기에 바쁘다. 정서적으로 우리와 다르지 않아 정치나 사상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자신의 주장을 펴는데 거침이 없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인근 꽃시장에 들렀다. 이곳저곳 기웃거려 보는데 수많은 꽃들은 대개 국내에도 보급된 것들이라 신묘한 종은 찾을 수가 없다. 2층으로 올라가면 더 많고 희귀한 꽃들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별 관심도 없고 더욱이 꽃을 사야 할 이유가 없어 대충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홍콩 꽃시장의 역사는 100년이 넘었다 하니 세계적으로 알려진 꽃시장인건 맞는 것 같다. 올 때 타고 온 21D번 시내버스를 이용해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시간, 아내와 딸과 함께 아파트 주변을 산책하며 하루를 정리한다. 한국 TV방송의 시청이 불가한 관계로 이제부터 시간 보내기는 각자의 자유다. 그런데 나는 심심풀이로 읽을 수 있는 소설집이 있다. 김영하 작가의 중편집인데 역시 짧은 내용답게 구성도 복잡하지 않고 흥미도 있는데다가 진행이 빠르다. 어제부터 읽는데 오늘밤 열두시 까지 4편의 작품을 읽었다.
또 의욕이 생기려는데 나이라고 하는 검고 묵직한 그림자가 나를 은근하게 누른다. 역량과 추진력은 미흡하면서도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사용하는 손자아이 방 2층 침대로 오르는 사다리는 직각이다. 몇 칸 안 되는데도 오르내리기에 만만치가 않다. 혹 헛발이라도 짚는다면 다칠 수도 있다. 이루지 못한 것 이제야 애석해 할 것도 없다. 다만 실족하지 말고 인생 무사하게 마무리 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다. 끝.
2023.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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