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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수필

[수필]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 (1,2차 퇴고 완료)

   安平大君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이다. 첫째는 문종이며 둘째는 수양대군이다. 어느 날 안평대군 이용(李溶) 은 꿈속에서 본 아름다운 경치를 못 잊어 당대의 최고 화원인 안견(安堅)을 자신의 사저로 부른다. 꿈속 경관을 이야기하면서 그대로 그릴 것을 부탁한다. 1447년 4월의 이야기이다.

 安堅은 3일 만에 대작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를 그렸다. 그시절 조선의 으뜸가는 서예가이며 인문학의  높은 안목을 가진 안평대군은 마음에 흡족하여 시를 짓고 박팽년 신숙주 서거정 등 23명의 인사들에게 시로 첨서 할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해서 조선 최고의 그림으로 불리는 몽유도원도는 탄생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안평대군과 안견은 가깝게 교우하며 지낸다. 어느 날 안견은 안평대군이 살고 있는 사저로 찾아왔다. 그림과 서예에 대한 고담준론을 나누던 자리에서 안평대군은 명나라에서 수입된 먹이 있다며 안견에게 보여준다. 국내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중국제 용매(龍煤) 먹을 감상하던 안견은 대군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것을 자신의 소매 속에 감춘다.

 수양과 안평은 형제간이지만 왕권에 대한 야심으로 세력 대결과 정적의 구도로 변한지는 오래되었다. 이날 안평과 안견은 조심스럽게 정치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었을 것이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안견은 귀가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소매 속에 감추었던 용매 먹이 방바닥에 떨어졌다. 이 광경을 바라본 대군은 크게 노하며 안견과의 절교를 선언한다.

 안견은 한동안을 묵묵히 서 있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과연 나의 비열한 행동이 후세에 어떻게 전해질까.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은 일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하랴. 안견은 애써 표정을 감추고 대군의 집에서 물러나온다. 안평은 각계의 인사들에게 이 이야기를 퍼트려 다시는 안견과는 상종치 않겠다고 선언하며 세상이 그를 비웃게 만들었다.

 1451년 안평은 마침내 자신이 꿈속에서 보았고 안견을 시켜서 그려놓은 몽유도원도 속의 경치와 똑같은 장소를 찾아내게 된다. 그곳은 바로 지금의 서울 종로구 부암동 일대다. 해마다 4월이면 복숭아꽃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곳. 안평은 그곳에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별장을 짓고 그를 따르는 인사들과 은밀하게 교류한다.

 그 무렵 수양대군 측은 권람이 천거한 모사 한명회 등의 책략으로 강력한 세력을 늘려가고 안평대군 측은 상대적인 수세에 몰리는 처지가 되었다. 1453년 10월, 마침내 수양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키고 김종서 황보인 등 반대파들을 대거 숙청한다. 안평 역시 강화도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지만 곧 사약을 받고 그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몽유도원도에 찬문을 쓴 안평의 가신들인 23인의 문사들은 대부분 차례로 죽음을 당하게 된다. 몽유도원도는 일종의 살생부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안견은 안평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실이 공개되었기에 죽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때서야 중국제 용매 먹을 훔친 것이 계산된 안견의 예지력이었다며 감탄하기를 마지않았다. 그 후에도 안견은 유명한 작품을 탄생시키며 조선 4대 화가 ( 정선. 김홍도 장승업. 안견)의 반열에 들게 된다.

 안견은 이러한 앞일을 예측하고 안평대군에게 절교당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용매 먹(龍煤墨)을 훔치게 된 것을 안평대군 역시 이미 알고 있었다. 용매먹 사건은 자신만이 알고 넘길 수도 있었을 텐데 구태여 세상이 다 알도록 공개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세력의 균형이 깨어진 뒤 수양대군의 난폭한 기질과 무단정치의 기세로 보아 앞날을 예측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안견의 인품으로 보아서 하찮은 먹 한 개를 훔칠만한 소인배가 아니다. 그것도 쉽게 탄로 날 만큼 허술하게 절도행각을 벌렸겠는가. 안평은 조선의 으뜸가는 화원을 아끼고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자칫 노한 척하며 절교를 선언하고 만천하에 공개했던 것이다. 국보급으로 남아있어 후세에 조선의 문화를 계승시켰어야 했을 몽유도원도는 임진 왜란때 일인에 의해 약탈당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1893년 일본 정부에 정식 등록, 지금은 그 나라의 국보가 되어 덴끼 대학(天氣大學) 중앙 도서관에 소장 중이다.

 안평대군의 별장이었던 무계정사는 그의 세력들이 모이던 곳이라 해서 이내 불태워 없애 버렸다. 지금도 그때와 같이 변하지 않고 건재한 것은 무계동(武溪洞)이라고 바위에 새겨진 안평대군의 친필 글씨와 해마다 사월이면 몽유도원도에서와 같이 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는 것이다.

 무계정사의 옛터. 종로구 부암동 329번지. 찬탈해서 누리던 권력의 시절도 아득하게 가 버리고 세월은 무정하게 흘러 560여 년이 지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모든 정치적 갈등 역시 흔적으로 남아 역사라는 바위에 새겨질 것이다. 武溪洞이라는 암각 글씨와 같이 오랜 세월 남아있을 이 나라의 바른 역사를 위해 자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불순세력을 몰아내는데 온 국력을 다해야 할 때가 아닌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