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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수필

[수필] 나눔 완성 (1,2차 퇴고 완료)

   지하철 출구로 나와 골목길로 접어들 때였다. 대형 약국 앞에 아무렇게나 쌓인 포장용 폐박스를 정리하는 여인이 보였다. 연만하신 이분은 박스를 정리하여 손수레에 싣기를 반복하느라 주변의 시선에는 무관심 하다. 바쁜 걸음으로 앞을 지나가던 한 남자어른이 주춤 하면서 그 여인에게로 다가간다.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그 여인에게 내민다. 상황을 모르는 여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 남자를 바라본다. “얼마 안 되지만 아침 식사라도 하세요.” 그제 서야 사태를 파악한 여인은 돌아서며 아니라며 극구 사양한다.

  여인은 결국 남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받는다. 노년에 접어들었을 이 남자는 이른 시간에 수고하는 여인의 모습을 보면서 아침식사도 걸렀겠다 싶어 측은지심이 발동했을 것이다. 내가 가진 것으로 남을 돕는다는 행위는 습관이 되어 익숙해지지 않고는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내 것 중 일부분을 떼어 모르는 여인에게 식사대로 드리는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신선한 자극을 받았다. 그와 같은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다. 나 정도의 나이에 수수한 옷차림과 철지난 운동화를 신은 것으로 보아 크게 부유한 인생처럼 보이지도 않는 그의 행동이 차가운 초겨울 아침에 마음을 따듯하게 한다.

    사랑은 받을 때 보다 줄때에 더 행복한 것. 재물은 쌓아 둘 때 보다 조건 없이 남에게 베풀 고 나눌 때에 더 행복해 지는 것. 어떤 자료에서 보니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은 내 것에서 하나를 빼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를 더 보태는 시너지 효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리석은 자는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 하지만 현명한 자들은 기부와 나눔을 통해서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가 행복해 지는 선행을 선택한다고 정의 한다.

   까치밥은 우리 민족에게만 있는 귀한 나눔의 풍습이다, 겨울날 옷 벗은 감나무 맨 꼭대기에 빨갛게 익은 홍시 서 너 알이 매달려 서정시의 한 구절처럼 마음을 끈다. 펄벅여사가 한국을 방문했던 1960년 겨울에 농촌을 여행하다가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달려 있는 빨간 홍시 몇 알이 보기에 좋았나보다. 자신을 안내하는 이에게 물었다고 하지. 저 감은 너무 높아서 딸 수가 없었군요. 안내원이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겨울에 먹이가 모자라는 까치나 작은 새들의 먹잇감으로 남겨둔 것이랍니다. 이 말을 들은 펄벅여사는 미물에게도 나눔을 실천하는 우리의 정서에 뜻하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는 것이다. 한국의 명승지나 궁궐을 관광하러 온 것이 아니고 저런 풍경을 보고 싶어서 온 것이라 한 그녀의 여행담이 우리를 따듯하게 한다.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은 새롭지도 깨달음을 주지도 못하는 일상용어가 되었다. 죽은 다음에는 재물이나 권세란 다 헛것이라는 진리에 가까운 사실을 알면서도 베푸는 일에 인색한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선천적 욕심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생전에 그토록 따르던 많은 인맥들,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이 소중한 자녀 가족 친척 친구들, 그러나 죽음의 세계에 까지 동행 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오직 하나, 남에게 나누고 베풀어준 선행이라면 죽음 저편에 까지 동행하여 그 이름을 후대에 빛나게 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한 여인 이야기다. 그녀는 잘 다니던 공무원의 신분을 벗고 기독교 신학을 공부한 뒤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 30대가 끝날 무렵에 대형교회의 목회생활을 정리하고 춘천 외곽지역에 작은 집 한간을 마련해 놓고 무의탁 노인들과 지적 장애우 들을 위한 생활보호 터전을 마련한다. 의지할 곳 없는 어르신들과 가정에서 버림받은 장애아동들을 위한 나눔의 동산을 세운 것이다. 혼자 살아 갈 수 없는 소외된 이들과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을 위한 무료 양로원을 운영한다는 것은 갸륵한 일이기는 하나 가지 않아도 좋을 험난한 길을 예상하고 그녀주변의 많은 이들이 우려했다.

  가족들의 의식주 문제와 처리해야 할 관공서 서류 문제 등 예상했던 것보다도 분주한 생활로 십여 년이 흘렀다. 그녀의 육신은 만성 피로가 쌓여갔을 것이다. 건강에 이상을 느끼고 찾아간 병원에서 돌이킬 수 없이 심각한 선고를 받는다. 운명을 하나님 뜻에 맡기고 기도 하면서 투병생활을 이어갔지만 결국 그해 여름 하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그녀가 설립한 동산 언덕에 묻힌 채 20년이 넘게 흘렀다. 무성한 잣나무가 우거진 숲속을 영원한 안식처로 제공했던 마을 장로님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가고 그 후손들은 도시에서의 삶을 위하여 임야 등 토지를 모두 매각하고 고향을 등졌다. 땅의 새 주인이 요청하기 전에 여인의 유택을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으로 지난 가을 무덤을 열고 유골을 수습 화장했다. 30분 만에 골분이 되어 돌아온 동산지기 여인의 남은 전부는 진정 흙으로 돌아가는 의식을 치르고 큰 나무아래에 평토장으로 묻혔다.

  작은 아파트 한 채와 낡은 경차 한대가 재산의 전부였던 여인. 무의탁 노인들을 위하여 전 재산을 바쳐 일구어놓은 동산. 그녀가 행한 나눔의 실체는 목숨까지 아끼지 않은 숭고한 밀알이었지 싶다. 더 이상 나눌 것이 없을 때 비로써 나눔은 완성되는 것. 자신의 뼛가루마저 흙과 나무와 땅속 미생물에게 돌려준 여인. 이제는 진정 아무것도 없는 그녀에게 어쩌면 영원히 남아있게 될 복지법인 설립이라는 선행(善行)의 열매만이 그녀를 빛나게 할 것을 믿는다.

  그런데 우리 형제들의 생애와 그녀를 사랑했던 동산 식구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아프게 남아있는 이 허전함은 어찌할까. .

                                                                         2022. 1.

 

 

                                              2022년 1월호 수필문학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