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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수필

[수필] 서울에서 길 찾기 (1,2차 퇴고 완료)

  남양주에서 대학로 근처로 출근을 하게 되었다. 집안에서 운영하는 어떤 업체에 내가 도울 일이 있어 1년간 계약직을 맡게 되었는데 직장이 생겼다는 것이 즐겁지만 가는 길이 좀 멀다. 경춘선 전철을 이용하면 두 번의 환승을 거쳐 4호선 혜화역에 내릴 때까지 한 시간이 걸린다. 중간에 걷는 시간을 합하면 대략 한 시간 반쯤 걸리는 셈이다. 상쾌한 아침 길을 걸어 전철역에 닿으면 잠시 뒤 열차는 도착하고 정해놓은 승강장에서 차에 오른다.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전 과정이 마치 산업현장의 자동 시스템처럼 정확하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차창 밖 너른 들판에서 아직은 깨어나지 않은 각종 초목들에 물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숨어서 자라나고 있을 비닐하우스 속 갖은 농작물인 연녹색 청초함이 보이는 듯하다.

  멀리 가까이 남양주 벌과 야산이 내 시선과 함께 간다. 철 따라 변하는 전원풍경과 끊겼다가 이어지는 산길 자동차 전용도로가 힘든 겨울을 벗어났다. 눈에 익은 천마산의 줄기들이 오고 가다가 사릉 벌을 지나면 은은한 대기 속 수락산 마당바위가 친근한 눈빛으로 세상을 내려다본다. 퇴계원 왕숙천을 건너 별내 신도시에 접어들면 높낮은 건물들 사이사이로 불암산의 바위 봉우리가 거대한 부처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열차가 서울의 변두리로 진입하면 지금까지 느끼던 산촌의 목가적 풍경은 마무리되고 상봉역을 지나 청량리역에 도착한다.

  영하 10도를 밑돌던 지난겨울 얼마간 승용차를 이용해 출근을 한 적이 있다. 추운 날 적당한 온도로 데워진 차내의 쾌적한 분위기에 앉아 따듯한 핸들을 잡고 의자에 몸을 실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에 비해 육신은 참 안온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아침방송을 감상하면 가끔 도로가 정체 되어도 느긋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유지할 수가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 뒤편에 자동차 전용도로가 있다. 가평군에서부터 시작되는 고속화 도로인데 이 길이 끝나는 부분에서 우회전하면 일산 방면으로 연결되고 좌측으로는 중부고속도로와 이어진다. 직진으로 진행하면 삼육대학이나 서울여대 앞을 거쳐 태릉선수촌과 육군사관학교 앞을 통과해 동부간선도로를 건넌다. 그런데 출퇴근길 이 도로는 많은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차량의 물결로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정지신호가 끝나고 녹색 신호등이 다 할 때까지 밀려있던 자동차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또 다음 신호에 막혀버리는 악순환으로 정체를 피 할 수가 없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길을 지나 석계역 고가를 넘어 월곡동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지체는 웬만한 인내심이 아니라면 자신의 수양 부족을 탓하게 될 것이다.

  이곳을 빠져나왔다 해서 쉬운 길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월곡동에서 미아리 고개를 올라 성신여대 그리고 삼선교와 혜화동에 이르기까지의 복잡한 정체 상황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전철을 이용할 때에 비해서 출근시간은 오히려 더 오래 걸린다. 그러나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장점과 겨울비라도 내리는 날의 편리함으로 한동안 승용차를 이용하게 되었다. 정체된 길에서 귀한 시간 허송하다 보니 좀 더 빠른 다른 길을 찾고 싶었다.

  집에서 출발하고 자동차 전용도로를 이용하는 것은 전과 같다. 그런데 도로 끝 부분에서 태릉으로 직진했던 것에 반해 판교 쪽으로 향하는 좌회전 코스를 택한다. 그 길은 수도권 제1순환고속도로의 연장선으로 송추 방면에서 온 차량들이 강동대교를 건너 중부고속도로로 진입하게 된다. 이 기점으로부터 2킬로쯤 가면 구리시 인근에서 성산대교로 이어지는 내부간선도로를 이용할 수가 있다. 이 길은 태릉 방면의 일반 차도에 비해서 흐름이 사뭇 빠르다. 가끔씩 지체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시간이 그리 길지가 않아 10분 정도 서행하다 보면 자연적으로 정체는 해소되어 고가도로인 월곡 정릉 그리고 홍지문 쪽으로 향하게 된다.

  그런데 이 길은 자주 이용하던 길이 아니다 보니 익숙하지가 않다. 고가로 만들어진 내부 순환도로에서 어디쯤 내려가는 램프(Ramp)가 있는지 혼란스럽다. 정릉에서 북악터널을 지나면 평창동으로 이어진다. 차라리 세검정 3거리에서 좌회전해서 경복궁을 돌아 혜화동 쪽으로 갈까. 조심해서 운행하다 보니 마침내 길 오른편에 국민대학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인다. 우측 깜빡이를 넣고 고가도로를 내려오니까 전방에 자 모양의 정릉 지하차도 반환점이 보인다. 좀 지나쳐 오긴 했어도 아리랑고개 입구로 되돌아가서 성신여대 방면으로 우회전하면 아는 길이 펼쳐질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직진으로 가는 길을 찾는데 고가 내부순환도로 진입로와 분별이 명확하지 않고 좌회전 길과 직진 차선이 판단을 어지럽힌다. 고가도로의 기둥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갈라진 같은 듯 다른 길을 조심스럽게 운행하다 보니 직진처럼 보이는 우회전 길이 나온다. 순간적으로 핸들을 돌려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길로 접어들었다. 순발력의 부족으로 인한 판단의 오류다. 직진 코스를 이탈하지 않았어야 아리랑 고개 방향으로 갈 수가 있다. 진로를 수정하기는 이미 늦었다.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1톤 트럭이 바쁘다고 클랙션으로 재촉한다.

  언뜻 성북동길이라는 안내표시가 급하게 지나간 것 같다. 기왕 잘못 들어선 길 그대로 더 가보기로 한다. 굴곡이 심한 좁고 가파른 길로 올라가 고개를 넘어가자 대사관로라는 도로명이 길모퉁이에서 운전자의 시선을 끈다. 고풍스러운 돌담과 기와지붕이 단아한 한국 가구박물관 앞 산복도로를 달린다. 많은 차량이 왕래하는 것과 아스팔트에 검은색 윤기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내가 모르는 도로인데 편리하게 이용되는 길이 분명하다. 성북구에서 태어나고 자라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온 고장이라 관내는 마치 손바닥처럼 익숙하다던 시절은 벌써 한세대 전에 지나갔나 보다.

  복잡하지만 필요에 의해 조성된 새로운 도로가 눈앞을 어지럽힌다. 비탈길로 한 블록쯤 주행하다 보니 길안내 화살표가 보인다. 좌측 길로 내려가면 삼선교다. 이쯤 왔다면 아리랑 고개로 돌아가는 것보다 한결 단축되었다. 그 길로 한 부럭 만 더 직진하고 좌회전한다면 혜화동에 이른다는 것은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다. 삼각형 2 변의 길이를 한 변으로 단축시킨 거리다. 정결하고도 명료하게 이어지는 성북동 산길을 내려오니 경신고교 앞을 지나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렀다. 지금까지의 출근시간에 비해서 반시간쯤 단축되었다.

  잘 못 들어선 길이 나도 모르는 새에 지름길이 되었다.

뒤돌아보니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불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길은 어디에고 있다. 인생도 잘못 들어섰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굽은 길을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 요즘은 봄이 익어 곳곳에 목련꽃이 벙글어 웃고 섰는 것을 감상하면서 전철을 이용한다. .

 

                                               202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