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실외기 받침대 위에 비둘기 한 쌍이 종종 날아와 머물다 간다. 울음소린지 혹은 서로 소통하려는 그들만의 언어인지 특유의 단음(單音)으로 목청을 가다듬다가 사라지는데 그 소리가 원치 않은 불청객처럼 신경을 거슬린다. 녀석들이 날아간 뒤에 확인하니 아직 둥지를 틀었거나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다. 잠시 머물다가 돌아가는 뒷모습이 살아갈 전셋집이라도 구하러 다니는 넉넉지 못한 서민 부부의 모습처럼 짠해 보이기도 한다. 그들의 처지가 안쓰럽기는 해도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비둘기를 사육함으로 발생하는 불결함이 인간에게 공해가 된지는 이미 오래된 것을 알기 때문이다.
비둘기로 인해 당한 곤욕을 친구 K군에게 들은 적이 있다. 날아든 비둘기를 길조(吉兆)로 알고 기뻐하던 며칠 뒤부터 겪은 그의 고충은 대리 체험으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가 있었다. 그가 들려주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녀석들이 날아들 때 마다 우리는 유리 창문을 두드리면서 애초부터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날려 보내기에 힘쓰고 있다. 그가 겪은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가 되어 들은 대로 이곳에 옮긴다. 물론 본인에게는 양해를 구했고 그 역시 흔쾌히 동의했다.
그는 고상하고도 조용한 인품 그대로 조근 조근 내게 들려주었다. 이렇게....
우리 집 베란다에 비둘기 한 쌍이 날아들었다. 처음엔 두 마리가 자리를 잡더니 며칠 지나서는 여남은 마리로 그 수가 늘어났다. 비둘기는 평화와 순결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성령의 임재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우리 가족은 모두 환호했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도 최선을 다 해야겠다는 각오로 마음이 부풀기도 했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즐거운 마음으로 비둘기부터 확인했다. 먹다 남은 빵이며 과자부스러기를 던져주면서 떠나지 말고 오래 머물러 주기를 바랐다. 반려(伴侶)삼아 그림처럼 드라마처럼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구구구...” 하는 비둘기 특유의 소리를 성령의 속삭임으로 까지 듣게 되었으나 실은 이것이 비둘기로 인한 공해의 전주곡이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며칠이 지났다. 그중 한 마리가 둥지를 틀고 앉았다. 신기한 마음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니 서 너 개의 알을 부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좋은 징조라며 즐거워하는 나에게 아내는 의미 있는 한마디를 건넨다. 평소 배려심 많고 잔잔한 성품에 비해서 어딘가 불만이 깃든 곱지 않은 말투였다. 뜰 앞에 쌓이는 비둘기 배설물을 보았느냐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현관문을 들어설 때마다 보이는 회갈색의 정결치 못한 흔적들이 생각났다. 아내는 이것을 일삼아 닦아내고 있는 눈치였다.
과연 그랬다. 집안 어디에고 날아다니는 비둘기의 털하며 배설물의 뒤처리 등 만만치 않은 일을 아내가 떠안게 된 것이다. 빗자루로 쓸어 보았으나 깨끗이 제거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물을 뿌리고도 한참 있다가 수세미로 문질러야 겨우 배설물의 흔적이 지워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뿐, 삽시간에 또 쌓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여간 역겨운 일이 아니었다.
비둘기로 인한 희망찬 상상은 얼마가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비둘기의 숫자는 더욱 늘어났고 배설물 또한 더해갔다. 이래서 안 되겠다싶어 놈들을 쫓아내기로 했다. 베란다 문을 열고 고함을 지르기도하고 금속성 기구를 심하게 두드려 보기도 했으나 그때뿐 놈들은 여전히 우리 집 베란다 안에서 떠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총을 이용하기로 했다. 실제로 플라스틱 작은 알맹이가 발사되는 총인데 살갗에 맞으면 제법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비둘기가 이 실탄에 명중되는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간혹 날개 부분을 맞은 놈들도 잠깐 움찔하고 놀라는 것 외에는 큰 효과가 없었다. 더 이상 번식이나 막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둥지 안에 품고 있는 비둘기 알을 모두 치워버렸다. 그런데 외출에서 돌아온 어미 비둘기의 탄식은 대단했다. 자식을 찾아 헤매는 어미 새의 울음소리가 하루 종일 온 집안을 들 쑤셔놓는다. 그 소리에 신경이 쓰여 다른 일을 할 수가 없다. 정신집중이 안될 뿐 아니라 자식을 향한 모성의 울부짖음에 이것 역시 할 짓이 못 된다는 판단으로 다시 제 자리에 갖다 놓았다.
이야기를 들으며 그 마음에 공감이 되기도 했지만 새(鳥) 가족의 천륜을 끊게 하려는 그 인간적이고 평화적인 사람 김군의 고충을 생각하면서 한참 웃었다.
년 초에 날아 들어와 자리 잡기 시작한 비둘기는 봄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자 그 수가 헤일 수조차 없이 늘어났다. 푸른창공을 선회하며 날갯짓하는 무리의 생동감을 볼 때 평화롭기도 하고 생태계의 아름다움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정작 이놈들을 울안에 두고 뒤처리를 감당해야 하는 우리 가족은 이제 그만 그 일에서 헤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비둘기는 귀소본능이나 방향감각이 뛰어난 새다. 창세기의 노아는 큰 비가 멈춘 후 비둘기를 지면에 보내어 물이 감(減)한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또한 1분에 1Km를 날 수 있는 비행능력이 있어 오래전부터 통신용으로 이용되었다. 기원 전 3000년경 이집트의 어선에서 연락을 주고받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전서구(傳書鳩)라는 이름으로 프랑스군의 전황을 알리는 통신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이처럼 창세기 때부터 함께 살아오면서 인류를 위해 유익함을 주는 새임엔 틀림없다.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김광섭은 성북동 비둘기라는 시에서 둥지를 잃은 비둘기의 운명을 가여워하고 있다. 문명에 쫓겨 사랑과 평화의상징까지도 희미해져 가는 비둘기를 애처롭게 읊었다. 성북동 하늘을 날던 비둘기는 파괴되어가는 자연환경으로 인해 삶의 보금자리를 잃고 떠돌이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 집 베란다까지 밀려와 둥지를 틀고 앉은 새를 우리는 우리의 이유로 해서 또 쫓아낼 궁리를 하고 있다.
김군의 이야기를 다 듣고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에 우리 베란다에도 비둘기 두마리가 선회하다가 에어컨 실외기 자리로 날아 앉는다. 가까이 접근해 보니 이런 세상에.... 잔 나무가지를 뫃아놓고 한 마리는 아예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마히 보니 이녀석도 알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문명이 발달되기 전에는 전서구의 임무로 인간사에 서도 한 몫을 하던 비둘기다. 주체 못할 배설물과 흩날리는 깃털로 해서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우리 집 비둘기가 오늘도 지붕 위를 선회하다가 베란다 공간으로 날아든다. 기계화 산업화로 인한 물질문명은 고도로 발달되었고 비둘기를 이용한 통신수단은 한낱 고대사 속의 전설로만 남아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갈 곳 조차 없어져 인간의 틈새에 빌붙어 생명을 보전하려는 비둘기의 운명이 애민(哀愍)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비둘기를 다시금 몰아내려는 우리의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까.
이 시대는 사라져 가는 녹지 공간으로 해서 인간들도 성북동 비둘기가 되어가고 있는지 모른다. 무분별한 개발로 실은 우리도 살 만한 환경에서 떠밀려 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새롭게 둥지를 틀어야 할 인간의 갈 곳은 어디일까, 비둘기를 향한 우리의 장난감 총 사격은 오늘도 계속되었다..
그는 상세하지만 담담하게 이야기를 마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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