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휘파람새의 속삭임

14,000원어치 비를 맞다

무슨 소린지 모르시지요?

오랫동안 두문불출 하더니 맛이 좀 간게 아닐까 하겠지만 들어보시면 알게 됩니다.

 

오늘새벽4시경 교회에 가는 길

지정된 지점까지 지정된 시간에 도착하는 소형 버스를 타야만 했는데

알람시간에 맞춰서 기상.

급하게 양치하고 세수하고 옷 입고 성경 들고 차를 타러 갔습니다.

 

쉽게 잠들지 못해서 더욱 짧은 여름밤이 지나가고

정확한 이른 시간이 되어야만 기상하는 촉박한 새벽

바지 입을 때 한쪽으로 두 다리가 들어가는 실수를 범해도

차를 타지 못할 만큼 여유 없는 시간이 재깍재깍 흘러갑니다.

 

집을 나와 한 백여 걸음이나 왔을까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하네요.

스마트폰으로 확인했더니 분명 비 소식은 없는데도.

 

되돌아가 우산을 가지고 나오면 차를 탈 수가 없을는지도 모를 촉박한 시간.

뭐 어떠랴. 우산이 없어도 걸을 만 한 아직은 보슬비 수준인데

걸어서 네거리 정류장 까지 갑니다. 그리고 매일이 똑 같은 시간에 차를 탔고.

 

예배가 끝나고 날은 밝아 새벽 여섯시쯤 집으로 돌아 가는 길.

비는 그쳤는데 하늘은 역시 비구름이 가득합니다.

갈 때 타고 갔던 미니버스를 타고 내가 새벽에 탔던 그 반대편에 내리기 바로 직전인데

여태까지 참았던 하늘이 자동차 앞 유리에 빗방울을 급하게 떨어트립니다. 그것도 아주 굵게.

에이구, 내가 내릴 때가 되니까 또 비가 쏟아지는구나.

우산이 없잖은가. 조금만 참아줄 것이지...

재수가 없는 건가. (새벽기도 마치고 돌아오면서 재수타령이라니...)

 

버스는 멈췄고 나는 떠밀리듯 비 내리는 새벽길 아스팔트 위에 던져졌습니다.

순식간에 내 허술한 여름옷은 비에 젖기 시작하는데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이 황량한 기분.

 

지나가는 택시라도 타야지...

오직 비를 피하기 위해서 택시를 세우려 하나

그 흔한 택시가 보이지 않는 것은 참 공교로운 일이지요.

 

마침 멀지 않은 곳에 24시 편의점이 새벽녘 밝은 등불을 밝히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일단 그곳으로 뛰어 들어갑니다.


나는 거침없이 우산이 진열되어있는 곳으로 가서

만만하게 뵈는 작은 우산 하나를 집어 들었고요.

계산대에서 가격을 물으니만사천원입니다.라는 말을 나는 잘 못 들은 줄 알았습니다.

다시 확인해도 분명히 금 만사천원이라는 것. 아무리 비오는 새벽길에 우산 파는 곳이 여기 하나라도 정말 너무 비싸다는 개념은 객관적인 사실아닙니까.

그런 우산을 언젠가 3.4천원에 산 기억이 있기 때문이지요.

 

잠깐이지만 급하게 따져봅니다. 집까지는 길어야 5.

이 비를 다 맞고 걷는다 해도 5분이면 집에 도착할 것이고요.

동시에 신발장에 그득히 꽂혀 있는 검은색 우산을 그려봅니다.

너무 비싸다. 억울하다. 이것을 구입하면 5분후에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집어 들었던 우산을 다시금 제자리에 놓아두고 편의점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집까지 5분간 비를 맞기로 결정.


그런데 참 인생사란 참 오묘해서 재미도 있습니다.

일만 사천 원을 아끼려 그대로 나온 그 바깥의 새벽길은 서서히 빗줄기가 가늘어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가늘어 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새벽길을 걸어 즐거운 마음으로 집에 도착합니다.

얇은 여름옷 상의가 촉촉하게 젖었을 뿐. 꼭 일만 사천원어치의 비를 맞았답니다.

소중한 현금을 아꼈다는 절약의 대견함도 그러하지만

평상시 분별력이 없고 매사에 우둔한 편인 내가 오늘 아침엔 현명하게 판단했다는데

기분 좋은 쾌감을 느낍니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흐뭇합니다.

 

만약 접는 우산 하나를 거금을 들여 구입했는데

우산을 받쳐 들고 거리를 십여 미터 걸었을 때 비가 그쳐 간다면

억울한 지불이었다는 생각에 하루 종일을 허망 실망 낙망해 하며 지냈을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은 뭔가 기대하지 않은 결과가 좋게 이루어 질 것 같다는 믿음이 갑니다.

인간의 정신이 해결의 열쇠를 발견하지 못한 우연이나 요행 혹은 신비란 이런 것이 아닐까.

좀 지나친 비약이겠지요? ㅎㅎ


 

 

'휘파람새의 속삭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부  (0) 2017.12.29
명화감상  (0) 2017.04.10
그리운 그레이스 켈리  (0) 2016.06.29
깊은 가을날 하루  (0) 2015.11.23
외톨이 가장  (0) 2015.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