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길을 걷고 싶다. 명징한 하늘에 어우러진 흰 구름을 바라보며 강물이 흐르는 들길을 걷고 싶었다. 마침 토요일 오후인데 흔치않게 맑은 하늘에 햇살까지 투명하다. 거실에 앉아 바라다 보이는 창밖 풍경이 날더러 어서 나오라며 손짓을 한다. 천마산 봉우리 위로 모였다가 흩어지는 조각구름이 갖은 형상을 만들었다가 지우고 지웠다가 또 만든다. 가을을 실어 나르는 경춘선 전철이 거실창 멀리 오고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어느새 나는 신발 끈을 조이고 무작정 춘천 가는 전철에 몸을 실었다. 어디쯤에서 내릴 것인가 작정도 하지 않았는데 열차는 대성리 강물 위를 달린다. 어디로 가면 하늘에 물든 강물과 들꽃과 바람이 있는 들길을 걸을 수가 있을까.
굴봉산 역에서 내렸다. 평소 춘천을 오가면서 나는 이 근처 강물 옆길을 걷고 싶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궁화호 시절에 간이역이었던 경강역은 없어지고 지금은 마을 안쪽으로 옮겨져 지역의 산 이름을 따서 굴봉산 역이 되었다. 바쁠 것 없어 보이는 노년들과 배낭을 짊어진 몇몇 등산객들만 오갈뿐 아직도 간이역 일 수밖에 없는 한적한 시골 마을, 주변은 복선 전철이 통행 하는 대중교통의 정거장답지가 않게 고요하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져 있는 아늑한 마을 북서쪽으로 하늘빛 강 물이 흐른다. 소양강이라는 명칭은 춘천지방을 벗어나면서 북한강이 되었다. 정거장을 나와 가을의 한 복판을 걷는다. 황금들녘의 익어가는 곡식들하며 논밭 사이 전통농가, 화단에 피어난 백일홍 맨드라미 코스모스. 가을바람에 들깨 밭이 향기롭다.
천천히 지나가는 농업용 트럭의 엔진소리와 꽁무니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까지도 가을향기로 전해오는 시골길. 그 길을 걸어 강물이 보이는 언덕에 까지 왔다. 길옆으로 피어난 쑥부쟁이와 퇴색해 가는 풀잎들, 걷고 싶었던 가을 풍경 속에서 가슴속까지 시원한 바람이 스친다.
팔십 평생을 맞고 보내는 가을인데도 세월이 거듭되는 만큼 감회가 별나다. 하늘이 맑고 푸를수록 나는 괜한 감정의 너울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한다. 삶의 파도 속에서 실종되어 버린 젊은 날의 가을이 어디론가 사라져 간 것처럼 지금 강 언덕에서 한들거리는 코스모스의 청초한 모습도 시들고 사그라질 것이다. 눈앞에 다가온 추운계절에 말라 비틀어진 꽃대 위로 삭풍은 휩쓸 것이고 산하는 곧 백설에 뒤 덮이고 말겠지.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구약성서 시편 기자도 이와 같이 빠른 세월로 인한 허무함을 시어로 풀어 우리에게 가치 있게 살 것을 권유하고 타이른다. 아직도 멀었을 것 같던 내 인생의 가을은 깊어가고 서쪽 하늘은 붉게 물든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걷노라니 풀밭길로 뒤 따라오는 긴 내 그림자가 심심하다. 가을 강물에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들의 자적하는 여유로움. 강가에 피어난 가을 꽃 감국 노란색 꽃잎위에 비치는 저녁노을, 춘성교 다리위로 무심하게 달리는 자동차 소음하며 늦은 오후의 붉은 햇살에 흔들리는 강아지풀 까지도 정겨운 강변길을 따라 고단할 만큼을 걸었다. 높은 산 너머로 숨어 버리는 짧은 가을 햇살이 야속하다. 그만 돌아가야 할까 보다. 내렸던 역까지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려면 46번국도(國道)인 육로를 이용해 다음 역 까지 걸어야 한다.
해 질 무렵이 되어 적당하게 시장기를 느끼며 찾아들어간 들길 옆 주점, 손님 없는 빈 홀이 내 속처럼 허전하다. 무엇에도 쫒기지 않는 여유와 혼자라는 자유로움이 갈증과 시장함과 적적함 보다 소중하게 느껴진다. 적요(寂寥)와 자유와 평안을 즐기는 길손이 되어 탁주 한 병을 주문한다. 다음 정거장 까지 가는 길은 아무래도 쉽지는 않을 것을 예상한다.
약간의 갈증, 견딜만한 피곤, 적당한 고적함 이라는 좋은 친구와 함께 하루를 마무리 한다. 해는 이미 서산에 졌고 몸과 마음은 기분 좋을 만큼 몽롱하다. 걷고 싶었던 시골길. 가을의 강물, 바람에 한들거리는 들꽃의 속삭임을 들으며 혼자 걷는 시간이란 영혼의 자유로움이 있어 즐길 만 한 휴식이 아닌가. 끝
수필문학 2019. 11월호 계재
'신작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 위치추적 (1,2차 퇴고 완료) (0) | 2020.09.21 |
---|---|
[수필] 겉볼 안 (1차 퇴고 완) (0) | 2020.03.10 |
[수필] 비를 맞다 (1,2차 퇴고 완료) (0) | 2019.10.19 |
[수필] 과꽃 (1,2차 퇴고 완료) (0) | 2019.03.30 |
[수필] 저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1차 퇴고 완료) (0) | 2019.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