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저녁나절, 모처럼 어릴 적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지하철역 인근에 자리 잡고 나를 기다린다 해서 하던 일을 정리하고 서둘러 갔다. 몇몇은 이미 소주잔에 취해 어릴 때의 이야 기를 하면서 웃기도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뇌하는 모습도 보인다. 오랜 세월이 흘러 되돌아 갈 수 없는 그 옛날을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역력하다.
식사가 끝나고 그냥 헤어지기가 아쉽다며 인근의 노래방을 가자고 한다. 나는 노래를 잘 하지도 못하면서 싫어하지도 않아 그냥 따라갔다. 합창단에서 노래를 배우고 익혔어도 누구 앞에 나서기에는 부끄러운 실력이다.
유행가 ''네박자''에 장단도 맞추고 설운도, 나훈아 노래도 부르면서 모두가 흥겨워한다. 노랫말이 주는 의미와 분위기 에 따라 즐기거나 향수에 젖기도 했다. 시간은 흐르고 나는 ''숨어 우는 바람소리''를 내가 들어도 괜찮게 불렀다. 나에게는 그거 한 곡이 그나마 자신 있는 레파토리다. 노래방 예약의 끝 시간이 다가온다.
조용필의 ''친구''를 합창하면서 마치려는 친구들의 의도를 아랑곳 하지 않고 나는 동요 ''고향의 봄'' 을 부르기 시작 했다. 동요가 주는 순수한 정서 때문 일까, 술 마신 친구들의 마음이 차분해 질 무렵, 다시 동요 ''오빠생각''을 예약 했다. 합창으로 부른 이 노래가 끝나니 모든 친구들이 옛 생각에 젖는 분위기가 확연해 진다.
이제 그만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나는 마지막으로 또 한곡을 신청 했다. 제목은 ''과꽃'. 다들 알고 있는 것처럼 이 노래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올 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다시 2절 노래가 이어진다. '시집 간지 온 삼년 소식이 없는 누나가 가을이면 더 생각나요.'
이런 노랫말이 돌아가신지 이십년도 더 지난 내 큰누나가 불현 듯 그리워진다. 나는 목이 메어 이어 부르기가 쉽지 않은데 곧잘 노래 하던 다른 친구들의 목소리도 점점 잦아든다.
거기서 노래는 끝이 나고 희미한 조명등에 비친 친구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런데 나는 목이 메일 뿐이었지만 친구들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두 뺨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세상 풍파에 칠십년 넘어 팔십 가깝게 시달려 이제는 감상(感傷) 따위에는 초연해진 것 같아도 우리들의 속마음에는 이렇게 순수한 감성이 타다 남은 불씨처럼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어 육신은 늙었어도 인간 본연의 고향은 늘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늦은 밤 귀가를 서둘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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