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근래 내 생활이 단조롭고 변화가 없으니 사소한 일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정해진 생활공간에서 지내다보니 무료함도 느끼지만 종종 행복하고 감사한마음을 갖기도 한다. 고희를 지나 이제야 말로 노년에 이르러 집에서 세끼식사를 해결 할 수밖에 없는 때인데도 나를 필요로 하는 일터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게다가 삼대가 덕을 쌓아야만 가능하다는 주말부부로 살아가고 있으니 나를 부러워하는 친구들이 많다. 생각하면 확실한 행복이며 감사한 일이다.
생활비 이상의 금액을 정기적으로 아내의 통장에 입금을 시켜 주는 것은 받는 이 보다도 보내주는 내가 더 행복하다. 내가 하는 일이 설혹 남 보기에 하찮은 일이라 해도 아무려면 어떠랴. 사람을 그릇에 비유한 성경은 귀한 그릇은 귀하게, 천한 그릇은 천하게 쓰이기도 하지만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기도 한다고 가르친다. 나는 내 그릇이 귀하지 않다 하더라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깨끗하게 쓰임받기를 염두에 두며 살아왔다. 소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화려한 인생을 살지는 못했어도 천박한 인품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에 나는 감사한다. 지금도 내 그릇에 합당한 일을 하며 산다고 믿으니 아쉬울 것도 불만스러울 것도 없다. 직업에는 귀함도 천함도 없다. 다만 천박하게 행동하는 사람도 있다는데는 동의하며 살아간다.
지난 토요일엔 일을 마치고 한 주간 만에 집에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집안이 쓸쓸하고 허전하다. 그러나 그런 미묘한 감정은 접어두고라도 우선 먹거리의 해결이 내 손을 거치지 않고는 만들어 질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절실한 문제로 다가선다. 아내가 잠시 집을 비웠는데도 이러한데 그녀가 이 세상에 없다면 그 얼마나 난감하고도 서글플까. 당분간 딸이 사는 곳에 다니러 갔으니 이내 돌아올 것이다. 문득 그녀가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일 뿐만 아니라 잔잔한 행복도 느낄 수 있었다.
행복이란 자신이 처해있는 좋은 환경과 처지에 따라서 느끼는 감정은 아니다. 다만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에 행복과 불행이 갈라지는 지극히 주관적인 관념이다. 삶에 큰 의미를 두며 살지 않던 내가 왜 이러한 행복한 감정을 찾으려 애쓰고 있는 걸까. 며칠 전에 들은 라디오 음악프로 중 진행자의 멘트를 통해서 내가 모르고 지내던 행복에 관한 정보를 듣게 되었다. 이 내용의 울림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행복은 바로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느낄 것이다. 철학자 플라톤이 주장하는 행복론을 그는 이렇게 전했다.
첫째로, 먹고 입고 살고 싶은 수준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두 번째,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용모.
세 번째,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것에서 사람들이 절반 정도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네 번째, 겨루어서 한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
다섯 번째, 연설을 듣고서 청중의 절반은 손뼉을 치지 않는 말솜씨.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조건인데 플라톤 쯤 되는 위대한 철학자의 말이니 나는 전적으로 믿는다. 바로 나 자신을 두고 한 말이 라고도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 전쟁을 겪고 5. 60년대의 궁핍한 시기를 지낸 뒤에는 오늘까지 먹고 입는 문제에는 별반 부족함이 없었다. 하긴 그런 정도의 풍요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누린 보편적 혜택이긴 하다. 그러나 주거문제는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도시에서 멀지 않은 전망 좋은 산촌에 그야말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자적하는 삶을 살고 싶으나 경제적인 여유 말고도 여러 가지 상황이 허락지 않아 중소형 아파트에서 조금 부족한 듯한 주거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보는 아내의 평가에 의하면 나는 많이 부족한 용모이긴 하다. 하지만 그리 혐오감을 유발시킬 만큼 추할 정도 는 아닌데다가 인상이 그리 악해보이지는 않는다고도 한다. 그러니 그 또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나는 이름도 빛도 없이 살아가는 소시민일 뿐이니 명예로운 신분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나를 아는 이들의 나에 대한 평가는 어떠할까. 나의 인품이나 인간적인 신용도 그리고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준법정신과 한 가정의 가장 역할 등에서 절반쯤은 인정해 준다는 것을 알기에 이 또한 플라톤이 말한 세 번째의 행복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고 자부한다.
체력으로 말한다면 근자에 누구와 힘겨루기로 승부를 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군복무 할 때엔 완전군장의 하절기 강훈련에도 낙오하거나 동료에게 군장배낭을 맡길 정도의 허약체질은 아니었다. 중도에서 포기한 병사들에 비해서 내 체력은 강하다. 그러나 기진한 동료의 배낭까지 메고 언덕길을 뛰어 오르는 이들에 비하면 조금 못한 체력이다. 또한 빈번하지는 않았어도 가끔 문학회의 모임에 나가 단상에서 어떤 주제에 대한 발표를 할 때 청중들 절반 정도는 박수를 치면서 동조해준 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 역시 플라톤 그분이 말하는 행복과 동떨어진 편은 아니지 싶다.
플라톤은 기원전 427년에 태어나 347년에 타계했으니 지금으로부터 약2400년 전 그리스에서 활동하던 철학자다. 그런데 그가 기원후 2000년대를 살아가는 나를 어찌 알고 이렇듯 포용력 있는 정의로 나를 위로하는 걸까. 이 사실을 알고부터 나는 참 행복한 부류에 속한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나는 이 세상을 살면서 낮은 자세로 살아온 적이 많았다. 재산이 많아 자신이 갖고 싶은 것 무엇이라도 소유 할 수 있는 부류들을 보면서 상대적 빈곤을 느낀 적이 있고 인물 좋고 잘 생긴 사람 앞에서면 내 외모가 비교되기도 했었다.
명예롭고 권세 있게 살아가는 이들 앞에서면 자신도 모르게 작아졌으며 언변이 좋아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 해도 남들을 설득시키는 능력이 출중한 자들을 부러워하며 살았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조건이 남 같지 못하다는 자괴감으로 나는 내 안에 있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행복이란 바로 내 안에 내가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말이다. (끝)
2017/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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