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손자 녀석을 데리고 동네 마트에 갔다. 빽빽이 들어찬 자동차 사이로 주차를 시키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내렸다. 그런데 차 안에 있던 아이가 문을 벌컥 밀어 옆에 있던 고급 승용차의 문 부분에 충격이 가해졌다. 확인하니 검은색 문에 우리 차의 흰색 페인트가 묻었고 찍힌 자국이 눈에 보일만큼 남아있었다. 그냥 모른 척 하기에는 양심이 허락지 않아 메모장에 연락 전화번호를 써 놓고 왔다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자동차 주인이 까다로운 성격이라면 문제 삼아 변상을 요구할 것이다. 그와 반대로 마음이 너그럽거나 남을 배려하는 일에 인색치 않은 성격이라면 별것 아니라며 부드러운 수건으로 문질러 버리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고급승용차라면 우리 차 두 대 값에 맞먹는 고가이니 재산 가치로 계산해서라도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수도 있다며 제 어미와 걱정스러운 의견이 분분하다. 터무니없이 큰돈을 변상하라면 보험으로 해결하자는 결론을 내렸지만 듣고 있던 나도 마음이 편치가 않다. 그냥 현장을 떠나올 것을 공연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든 격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알고도 모른 척 한다는 것은 뺑소니 범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사실이기에 결국은 잘 한 일이라고 생각을 고쳤다.
저녁시간에 누군가 알 수없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왔다. 역시 차량 긁힘의 사고를 이야기 하면서 좀 만나자고 한단다. 목소리만 듣고서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나직하고도 감정이 격하지 않은 남자의 톤으로 보아 그리 크게 문제 삼을 것 같지는 않다고 한다. 사건의 당사자인 세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그를 만나러 나가는 딸에게 “큰소리가 나오거든 순순히 인정하고 변상하라”고 일러 보냈다. 아이들이 나가고 난 뒤에 나와 아내는 궁금한 마음이 여간 아니다. 원만하게 해결되기를 기대하면서 초조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난 4월 어느 비오는 토요일 오후였다. 우산을 쓰고 역삼역 인근 이면도로를 천천히 걷고 있는데 느닷없이 RV승용차 한 대가 나를 밀어 넘어지게 했다. 차는 급히 멈추었어도 빗물이 고여 있는 아스팔트 위에 뒤로 넘어지고 보니 등짝과 바지 뒷부분이 삽시간에 물에 젖었다. 내가 늙어 근력이 없어져서 인지 아니면 자동차에 의한 충격이란 의외로 큰 것이라서 인지 일어나기조차 쉽지 않았다. 주변의 행인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어 나를 일으켜 주면서 옷매무새를 고쳐 주기도 하고 옷에 묻은 빗물도 털어 준다. 저만큼 동댕이쳐 진 가방을 들어다 주기도 하는 일련의 모습들이 고맙게 느껴진다.
운전자는 중년의 여인이다. 차에서 얼른 내리지도 못하고 당황해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한참만에야 내린 그녀는 죄송하다며 백배 사죄를 한다. 나는 몸을 여러 각도로 굽혀보기도 하고 팔다리를 움직여 보아도 어디 한 군데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큰 충격은 받지 않은 것 같다. 주변의 사람들은 웬만하면 병원으로 옮겨서 확실한 진단을 받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한다. 운전한 여인도 모여 든 사람들 처럼 일단 병원으로 가자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병원까지 갈 것이 무엇 있겠나 싶어 잠시 망설였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내가 넘어지는 바람에 들고 있던 우산은 뒤집어져 못 쓰게 되었다. 우선 비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녀의 자동차 안으로 들어갔다. 큰 구경꺼리라도 생긴 것으로 알고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별 것 아닌 것이라고 판단되어서인지 하나둘 제 갈 길을 가고 운전자와 나만 남았다. 그녀는 수 십 년 무사고로 지냈는데 오늘은 황당한 일을 당한 끝이라 정신이 없어 실수를 했노라 며 극구 자기변명을 늘어놓는다. 내가 합의금 조의 많은 배상을 요구하거나 해결 방법을 민형사상의 골치 아픈 쪽으로 몰고 가면 어쩌나 걱정하는 눈치가 빤히 보인다. 마침 그날이 토요일이니 일요일 하루 쉬면서 경과를 본 뒤에 병원치료를 결정하자고 말한 뒤 그녀와 헤어져 집으로 왔다.
집에 돌아온 후에 아내에게도 그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가족이나 주변의 그 누구에게 라도 함구한 것은 혹 내가 생각하지 못했거나 바르지 않은 어떤 다른 방법의 해결책을 권유할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에서였다. 또한 교통사고라는 사회적 트라우마로 인한 걱정을 떨치지 못 할 가족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룻밤을 지내고 나니 넘어질 때의 충격으로 엉치뼈가 약간 저릿저릿 한 것 외에 다른 곳은 아무렇지도 않다.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닌 것 같아 그냥 참기로 했는데 그 외에 별다른 증상이 없는 것이 나에게는 물론 사고를 저지른 가해자에게도 퍽 다행스러운 일이다.
월요일 오전시간에 나는 가해 여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틀간 지나보았어도 아무런 이상이 없으니 병원에 갈 필요는 없을 것 같다며 안심 시켰다. 그녀는 몇 번이나 미안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 하면서 내게 은행 계좌번호를 알려 달라고 한다. 연만하신 어른을 빗길에 넘어트리는 사고를 저질렀으니 다만 얼마라도 위로금 조의 성의를 표하는 것이 예의라는 것이다. 한두 번 사양 했으나 그렇게 하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는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만약 내가 가해자였어도 그런 방법으로라도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 했을 것 같다. 큰일을 해결한 것 처럼 마음이 개운하다.
낯선 남자의 전화를 받고 나갔던 딸아이가 한 시간 쯤 뒤에 귀가 했다.우리는 궁금한 마음으로 결과를 물었다. 대답하는 딸아이의 표정이 밝다.“그냥 지나쳐도 될 일인데 연락처를 기입한 분이 누구신가 궁금해서 뵙고 싶었어요.”라는 사내의 표정은 오히려 즐거워 보이더라는 것이었다. 그는 세 살짜리 손자아이의 작은 손에 만 원 짜리 지폐 한 장을 들려주고“자동차 찍힘 부분은 괜찮으니 염려 말라”면서 찻값까지 지불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인생사는 메아리 같아서 내가 베푼 만큼 되돌려 받는다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두리라.』이와 같은 교훈은 성경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고 경험으로 깨닫게 마련이다. 우리는 아들딸 사위까지 운전을 하며 나 역시 가끔씩 운전대를 잡는다. 그런데 자신이 조심운전을 한다 해도 크고 작은 사고는 늘 우리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안다. 모처럼 심성과 정서가 아름다운 인격체를 만난 것으로 그날 이후 오랫동안 흐뭇한 기분 속에 지냈다. 끝.
2016/07/29
'신작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 저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1차 퇴고 완료) (0) | 2019.03.13 |
---|---|
[수필] 만추의 주산지 (1,2차 퇴고 완료 6/5) (0) | 2017.11.02 |
[수필] 들길을 걸으며 (0) | 2017.03.23 |
[수필] 플라톤과 나의 행복 (0) | 2017.03.13 |
[수필] 미리낸 부의금 (1,2차 퇴고 완료) (0) | 2016.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