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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수필

[수필] 추억의 소환

추억의 소환 

                                                                                    남월선

  라디오에서 이 음악이 흘러나오면 나는 기대하지 않은 손님이 내 집에 찾아온 듯 반갑다. 쇼팽별에서 떨어져 나온 운석이 전화선을 타고 누추한 나의 안거에 날아와 생긴 분화구의 흔적이 남아있음이다. 음악이라면 국적불문 장르불문 좋아하는 편이지만 즉흥환상곡의 전주가 흘러나올 때의 왠지 모를 그 설렘이 나는 좋다.

 

  지금도 엘리제를 위하여 가 흐르던 영동전파사에서 생애 첫 음반을 고를 때의 두근거림을 잊지 못한 다. 베토벤이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작곡한 음악에 왜 내 마음이 두근거렸을까. 시공을 초월하는 음악의 에너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여고시절 바자회에 출품한 뜨개소품을 담임 선생님이 사겠다고 했을 때 나는 거금의 용처를 고민하다가 트로이메라이, 로망스 등이 담긴 소녀 취향의 LP 한 장을 사기로 마음먹는다. 사과궤짝에 종이를 발라 책상으로 쓰던 내 형편으로 놔둘 데도 마땅찮은 음반을 사는 것은 대단한 사치와 호기였다. 일찍이 내 취향의 일면을 드러낸 셈이었다.

 

  직장에 다니며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되자 음반가게 순례가 시작된다. 유명 영화음악이나 비틀즈의 음반을 고를 때도 있었지만 클래식에 마음이 더 끌렸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고 음반이 늘어나자 드디어 읍내 전파사에서 큰맘 먹고 외제 포터블 전축을 마련한다. 자타가 인정한 귀중품 목록 1호였다. 음반과 함께 이삿짐의 무게와 부피를 느리던 애물이기도 했지만 영혼의 무게도 함께 늘려주었다. 훗날 종로 르네상스 음악실을 드나들 때서야 음향기기의 성능 차이를 실감하지만 그땐 여지가 없는 선택이었다. 직장과 숙소를 오가는 사회초년생의 단순한 나날에 그게 없었다면 무슨 재미로 살았을까.

 

  "이 음악을 아세요?“ 따르릉 울리던 벨소리와 첼로처럼 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더빙되어 변주곡처럼  들리던 피아노곡이었다. 전화선을 통해 극적으로 조우한 탓에 즉흥환상곡은 제목처럼 그다지 환상적이었다는 기억은 나지 않는다. 라디오를 듣다가 좋아 혼자듣기 아까워 전파사에서 본적이 있는 내게 들려주는 거라며 친절하게 해석까지 덧붙였다. 떠오르는 악상을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표현하는 피아노 음악의 한 장르라고, 쇼팽 환상곡 4번이라고...

 

  그때 내가 근무하던 곳이 빤한 동네여서 연배가 높은 클래식 마니아라는 그 분의 정체를 다음날 바로 알게 되었다 한 음악이 내게 오는 것이 단지 우연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떠밀린 듯 쇼팽의 음악 호수에 풍덩 빠져버린다. 어쩌면 호숫가를 서성이며 피아노의 시인이 도래하기를, 피아노의 신이 강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후 발라드, 협주곡, 녹턴, 전주곡, 왈츠, 폴로네이즈 등의 주옥같은 음파 속을 나는 오랜 시간 유영해 왔다. 작업할 때 들으면 노동요가 되고, 외로울 때 들으면 친구가 되어주던 음악이다. 잠 못들 땐 자장가가 되어주더니 드디어 수필의 주제가 된다.

 

  경춘가도를 달리는 차안에서 즉흥환상곡과 다시 조우한 것이다.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버전이  었다. 운전을 맡은 S 선생이 칸타빌레 부분을 휘파람으로 부는 것이었다. “어머나, 이곡을 아세요?” 나는 오십 여 년 전에 내가 받았던 질문을 S 선생에게 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즉흥환상곡에 또 한 남자가 입장하는군. 창작자 쇼팽을 필두로 그의 음악을 전해 준 자와 그때의 추억을 소환해준 분이다.

 

  나는 이제껏 묻어두었던 그 음악이 내게 온 날의 추억을 들려주었다. 바람소리만 삭막하게 들리던 그 겨울에 기적처럼 찾아와 평생을 함께한 음악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기에 좋은 분위기였다.

 

  그날 상천고개를 자동차로 넘으며 S 선생은 휘파람으로, 나는 허밍으로 즉흥환상곡의 즉흥 공연을 시도했다. 관객은 K선생 한 사람이었다. 휘파람과 허밍의 조합은 처음일 꺼 라며 으스댔지만 허밍파트의 부실로 환상을 깨버리는 우를 범한 것 같다. 그렇더라도 문학동지에서 음악동지 까지 되는 게기가 된다.

 

  휘파라미스트! 나는 옛 추억을 소환해준 선생에게 휘파람새라는 별명을 지어드린다. 선생의 수필집 휘파람새의 전설과도 통하는 의미 있는 별명이다. 쇼팽의 즉흥환상곡은 일반인은 물론 음악도가 가장 좋아하는 피아노 곡 이라고 한다. 음표 뒤에 숨어있는 작곡가의 심중을 헤아리며 격정과 평안이 담긴 선율을 음미한다. 잔잔한 강물인가 하면 천길 아래도 쏟아져 내리는 폭포 같고 산들바람인가 하면 폭풍우가 몰아치는 벌판에 서있는 느낌이니 삶의 희로애락을 표현한 음악 가 아닌가 싶다. 피아노의 시인이라는 찬사가 당연했다.

 

  쇼팽콩쿠르 1등 수상자가 나올 만큼 음악 저변이 높고 넓고 깊어졌다. 쇼팽의 호수에 추락해 추종자로 살아온 날에 감사한다. 언제라도 좋아하는 연주자의 공연을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음악은 나를 지탱해 주는 버팀목이자 필수 영양소다.